<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고
스포일러 있음
(중간에 하루 출근한 날을 제외한다면) 길고 긴 연휴의 끝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로 장식했다. 감독도 감독이지만 디카프리오와 숀 펜, 베네치오 델토로가 나온다 하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고 먼저 본 사람들의 상찬이 이어지니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걱정은 딱 두 가지 너무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그리고 장장 160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이었지만 기우였다.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순 없지만, 전직 혁명가였지만 지금은 술과 약에 찌들어 살던 아빠가 인종차별주의자에게 납치된 딸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다. 스토리 구조는 단순하지만 인물들은 복잡하다.
폭탄 전문가이자 프렌치 75라는 반정부 혁명 조직의 조직원 밥 퍼거슨(디카프리오 분)은 혁명의 이름으로 행했던 과거의 일들을 어느 정도는 부끄러워하며 딸과 함께 하는 일상을 지키고자 한다. 밥의 애인이자 윌라의 엄마인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 분)는 투쟁의 선두에 서며 분위기를 띄우는 돌격대장이지만 철없는 행동으로 자신과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하고 끝내 경찰에 잡힌 뒤에는 살기 위해 동지들을 배신한다. 한편 16년에 걸친 집요한 추격을 보여주는 스티븐 J. 록조(숀 펜)는 출세욕이 가득한 인종차별주의자 군인으로 16년 동안 숨어 지내던 밥 퍼거슨과 딸 윌라를 마침내 찾아낸다.
스토리 전개도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르다. 보통의 경우라면 각성한 아버지가 멋진 액션으로 딸을 구해내야 하지만, 밥은 어쩐지 모든 게 어설프다. 도망치다가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경찰에 붙잡히고, 달리는 차에서 탈출할 때도 딸을 생각하며 두려움 따위 느끼지 않는 용맹한 모습이 아니라 무서워서 뛰어내리지 못하다가 운전자가 일부러 떨꾸면 그제서야 겨우 차에서 탈출한다. 결국 윌라를 구하는데 밥이 한 일은 딱히 없고, 윌라는 이름 모를 인디언 출신 해결사의 도움과 스스로의 용기와 기지로 살아남아 아빠를 만난다. 비장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각성해서 딸과 가족, 때로는 애인을 지켜내는 지극히 미국적이고 할리우드적인 남성 영웅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이 재밌었는데, 요새는 남성영웅 서사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 제법 많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아주 흥미롭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무척 재밌게 본 까닭은, 이 어리숙하고 흐리멍덩한 아빠가 실패한 전직 혁명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로 보았고, 혁명이 왜 실패했는지를 묻고 답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 질문과 대답의 핵심에 바로 밥 퍼거슨과 그의 동지들, 프렌치 75가 있다. 영화가 이들을 그리는 방식이 바로 이 혁명이 실패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프렌치 75는 급진적인 사상을 갖고 있고 동시에 군사적이고 파괴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말과 행동 모두 굉장히 급진적이며 또한 폭력적이다. 물론 이들은 이민자들의 구금시설을 습격해 이민자들을 구출해내기도 하고 상당한 조직력으로 통신망을 구축하고 피난처를 운영할 정도로 상당한 행정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지만 프렌치 75가 혁명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결국 폭력이다.
폭력 즉각적인 쾌감을 선사하기 때문에 저항운동에서 굉장히 효과적인 수단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은 혁명의 성공을 바란다면 폭력보다는 비폭력적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이를 논증하는 책 <비폭력 시민혁명은 왜 성공을 거두나?>나 심지어 전쟁 시 침략국에 대한 저항 방법으로서 비폭력 시민저항을 주장하는 <전쟁 없는 세상>을 참고하면 좋다.)
폭력 혁명, 다시 말해 군사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저항은 필연적으로 저항운동을 남성화된 정치행위로 몰아간다. 이는 전쟁의 논리, 군대의 정치 행위 방식과 똑같다. 적에 대한 절멸. 공존 불가.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고 더럽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토 나올 정도로 역겹지만 그들을 모두 제거하는 건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평화는 싸움이 없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적과 싸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할 수도 있지만 존재 자체를 절멸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하지만 남성성의 정치,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는 폭력적인 정치(혹은 전쟁)는 적대하는 세력과 공존을 택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프렌치 75의 혁명은 정확히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요즘 '해로운 남성성', 혹은 '폭주하는 남성성' 같은 개념으로 이 시대의 남성성을 이야기하는 시도가 많은데 나는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남성성을 '어리석은 남성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리석다고 말하는 까닭은 굉장히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비장하지만 보는 사람들은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어설픔과 설익음이 영화 내내 등장한다. 영화는 확실히 이들을 체게바라나 이현상 같은 이미지로 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혁명을 꿈꾸는 학생운동 조직의 구성원으로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 시절의 나와 내 동료들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당시 우리는 경험은 부족했을지 몰라도 정말이지 순수하게 진지했다. (더러는 조직이 분열하면서 사회운동을 떠나기도 하고, 밥 퍼거슨처럼 나이 먹고 가족을 가지면서 혁명보다는 일상의 안위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순수와 진지함을 갖고 현재 한국 사회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내가는 그 조직 출신의 훌륭한 분들도 많다.)
다만 순수하고 진지했지만 우리 조직은 과하게 교조적이었다. 영화에서 밥 퍼거슨이 딸이 먼저 피신한 집결지를 알아내기 위해 비밀접속망을 기억해 내 전화를 걸지만 통신원이 낸 암호에 대한 답까지는 기억해내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밥은 자신을 설명하며 답답해하지만 통신원은 "혁명 이론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지청구를 놓으며 계속 암호를 요구할 뿐이다. 혁명가의 마음 가짐이나 엄중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대관절 암호 외우는 것과 혁명이론이 무슨 관계며, 아니 그보다 먼저 저들의 혁명이론이 대체 무엇인지가 궁금해지는 실소가 나오는 대목에서 나는 문득 우리들의 과거가 떠올랐다.
2000년대 초반, 김대중 정부 시절에 나는 대학을 다녔는데 방학이면 조직에서 학번별 세미나 모임을 운영했다. 9박 10일 동안 모여서 철학, 혁명사, 학생운동사 등등을 공부했다. 뭐든 공부는 좋은 것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하러 모이는 과정이 좀 웃겼다. 우리는 평상시에도 조직의 윗선에게 "우리는 혁명을 꿈꾸는 조직이고, 혁명 조직은 언제든 정부의 탄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안에 신경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그래서 세미나 모임에 갈 때도 엄청 주의를 기울였다. 한 번은 성남에 있는 어느 아파트가 모임 장소였는데 나는 따로 전달받은 방식 대로 삼각지에서 일행을 만나서 대전에 갔다가 다시 서울역으로 와서 잠실로 이동한 뒤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다. 혹시라도 모를 미행을 따돌리기 위한 방식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교통수단을 기록이 남지 않는 현금으로만 내야 했으며, 당연하게도 9박 10일 동안 휴대전화는 꺼놔야 했다.
밥 퍼거슨에게 혁명 이론 운운했던 통신원이나 조선공산당사 공부한다고 흔적을 지우고 식구들과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세미나를 갔던 나나 본인 스스로는 무척이나 진지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그 진지함 때문에 더더욱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그렇게나 진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허술했다. 밥 퍼거슨처럼 약을 하진 않았지만 술 마시다 정신줄 놓는 건 일도 아니고, 퍼피디아처럼 영웅 심리에 투쟁을 그르치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잡혀가서 고문당한 적은 없지만 잡혀갔다면 협박 한 번에 밥과 윌라의 은신처를 술술 불었던 하워드처럼 우리 또한 고문당하기도 전에 술술 불었을지도 모른다.
쓰다 보니 여러 기억이 떠오른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노동절을 하루 앞둔 4월 30일, 노동자 계급투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군의 학생운동 그룹은 따로 430 청년학생문화제를 치르고 노동절 집회에 함께 나갔는데, 일 년 중 이게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당연히 1학기 개강하자마자 준비에 들어가고, 각 학생운동 정파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430청년학생투쟁단을 공동으로 조직하는데, 이때 투쟁단의 대장을 어느 정파에서 가져가느냐가 중요한 쟁점이었다. 정작 투쟁단 발대식에는 겨우 50명이나 올까 말까 한데, 투쟁단 대장을 정하는 회의에는 100명이 넘게 모였다. 모여서 자기 정파의 대표가 투쟁단 대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그 장면을 생각해 보면 백 분 토론이 아니라 봉숭아 학당이 따로 없다. 서로 말도 안 되는 트집 잡기에 억지 부리기를 하면서도 마르크스가 이랬네 레닌이 저랬네, 마오쩌둥은 어땠네 같은 이야기를 현학적인 척 늘어놨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자리에서 구경꾼은 아니었고 열심히 토론에 참여하는 쪽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당당하게 해댄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나는 재미없는 책은 그때도 안 봤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레닌의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얼토당토않은 말을 논리적 주장이랍시고 해댄 것은 똑같았다.
그런데 나는 당시 이런 내 모습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무작정 싫지 않다. 당시 우리는 어렸고, 서툴렀고, 실수투성이였고, 그래도 되는 때였다. 문제는 안 그런 척 오지게 했다는 것. 우리의 과격함은 내용이 없음을 들키지 않기 위한, 용기가 없음을 숨기기 위한 과한 제스처였다. 아니, 우리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고,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 저항운동이 성공할 리가. 입으로 백날 혁명을 이야기해봤자, 우리가 말하는 혁명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뜬구름 잡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밖에 못하는데 말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이야기해 보자면 프렌치 75의 멤버들 또한 앙상한 철학, 부족한 논리, 사람들과 대화하고 설득하려는 지난한 과정의 부족을 폭력의 스펙터클로 감추고 있는 것이 당시 나와 비슷해 보인다. 다른 점은 우리는 입으로만 폭력 투쟁을 찬양했을 뿐 실제로는 그렇게 심하게 폭력적이지는 못했는데(그래서 다행이다) 아무래도 총기 사용이 가능한 미국이다 보니 이들은 아낌없이 쏘고 터뜨리는 과격파 행동주의자라는 점. 그런데 영화에서 깊게 다루지는 않아서 오해일 수도 있지만 프렌치 75를 보다 보면 폭력이 수단을 넘어서 혁명의 목표 그 자체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무엇을 위한 혁명인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도덕과 윤리, 전략과 전술, 계획이 필요한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실종된 채 폭력의 쾌감에 중독되어 버린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폭력이 혁명(혹은 투쟁)의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표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폭력의 속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폭력 투쟁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사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물리적이고 구조적인 막강한 폭력에 맞서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사회운동의 힘이란 결국 더 많은 사람이 대의에 동참하거나 최소한 불의에 가담하지 않을 때 생기는 법인데, 이는 때로는 오랜 세월의 노력이 필요하다.
혁명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김남주 시인은 '전사'라는 시에서 일분일초의 약속도 어기지 않는 엄숙함, 동지를 아끼고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을 단절하는 단호함 같은 것을 강조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회의 궁극적인 변화를 포기하지 않은 이 시대의 혁명가라면 지난한 세월을 견디는 뚝심, 실패를 쌓아가면서도 지치지 않는 인내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라면 군대 가야지"란 말이 너무나 당연한 세상에서 평화를 위해서는 군대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인식이 당연한 세상을 바뀌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싸우고, 설득해야 하는지. 군대를 거부한 병역거부자를 최소한 감옥에는 가두지 말자는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밥이 윌라를 데리고 숨어 지낸 16년보다 긴 18년이 걸렸다. 이걸 넘어서서 군대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평화가 우리가 해야 하는 노력이라는 걸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게 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할까. 아니 모두가 평화주의자가 도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런 주장이 현실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져 군축이 정책적으로 시행되려면, 한국군의 병력이 줄어들거나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구매에 쓰는 세금이 실제로 줄어드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
이 세월을 견디며 노력을 지속하는 힘, 이건 밥 퍼거슨이 만드는 폭탄이나 퍼피디아가 쏴대는 기관단총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힘이고 이 시대의 혁명가들이 기대야 하는 힘이다.
영화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아빠 밥 퍼거슨은 도움 1도 안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은 윌라가 어디선가 지하라디오를 통해 들려온 소식을 들으며 또 다른 혁명의 투쟁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 난리 부르스를 겪고도 사회변화를 포기하지 않는 점이 무척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과연 이들의 투쟁 방식은 얼마나 달라졌을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윌라가 함께 하는 혁명이 과거 밥과 퍼피디아의 프렌치 75와는 다른 방식이길 바라며 영화관을 나섰다.
요런 포스터를 보고선 디카프리오가 엄청 멋진 액션 활극을 펼치는 줄 알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