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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Mar 04. 2022

하얀 분이 난 곶감 맛

시인이 머물렀던 자리

시가 머물렀던 자리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시가 인간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쓰는, 시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쓰는, 시를 생산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인 내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_p.124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첫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가 1989년 처음 출간된 지 32년 만에 난다에서 다시 나왔다. 기존 책에 수록된 25편의 산문에 4부 1995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록이 더해진 개정판이다. 1976년에 쓴 산문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에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라는 문장에서 2013년의 「신비주의적 꿈들」까지로 나아간다.





인생의 궤도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싸워가면서 사는 법, 살아야 하는 법을 철저히 배우기 위해. 공부하듯이……   (1976)

_p.15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


조각가 지망생 노당과 회화를 하는 정낙구, 가난한 두 친구가 배고픈 밤이면 화실 뒤 시장 골목에서 쥐를 잡아먹고 살았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배고픔만큼 강한 공감을 일으키는 것도 없다."라지만, '배고픔만큼이나 요지부동인 예술의 꿈'이라니.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갈증 같은 예술의 꿈이 '꿈의 배고픔'이 '배고픔의 꿈'인 듯 그대로 삶이 된다는 건 꿈인가. "진정으로 훌륭한 예술이란 어쩌면 어떤 배고픔, 아니면 그것의 다른 얼굴인 어떤 꿈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해놓은 것이 아닐까. (1980)"




인간은 즐거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아니면 괴로움을 먼저 발견했을까?

_p.20 「산다는 이 일」


"진흙탕에 빠진 사람처럼 시간의 밑바닥에 한 마리 벌레로 누워 꼼지락거린" 수없이 많은 밤을 지나, "그럼 어떠냐, 뻗을 대로 뻗어라, 네 팔자로 뻗어라. 어차피 한판 놀러 나왔으니까, 신명 풀리는 대로 놀 수밖에, 신명 안 풀리면 안 놀 수밖에. (1981)"라는 글을 풀어낸다.


나는 지금 그 순간을 꿈꾸고 있다.
내가 첫발을 떼어놓는 그 순간을.

_p.27 「시를 뭐하러 쓰냐고?」


"시를 뭐하러 쓰냐고? 글쎄 그럼 시를 뭐하러 안 쓰지?" 문득 최승자 시인을 통과한 시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시들은 이제 쉽게 쓰이고 쉽게 잊히고 쉽게 버려진다."라는 문장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이 다만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을 뿐이다. (1989)"라며, 불안이 목을 조르는 한밤에 일어나 앉는다. '산다는 이 일'이라는 수수께끼를 향해 '공포로부터 생겨난 죽음이라는 관념을 극복하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 외국은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시인의 시선에 특히 눈길이 다.





그러나 그 헐벗음 속에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 속에서 이제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할 차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 결국,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발음해야만 한다'. (1984)

_p.60 「떠나면서 되돌아오면서」


"너 땜에 알았어/왜 사람과 사랑이 비슷한 소리가 나는지" 2018년 발매된 BTS(방탄소년단)의 <LOVE YOURSELF 結 'Answer'> 앨범 수록곡 중에 RM의 솔로곡 'Trivia 承 : Love' 나오는 가사가 떠올랐다. 최승자 시인이 기록한 삶은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과 사랑이 있다. '빛나는 것은 모두가 보석이라고' 믿었던 맹희, 뒷모습만 보이며 한없이 걸어가는 어머니.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어느 날 문득, 그들이 돌아와 그 부재의 자리를 다시 채울 때까지. (1986)" 비어서 더욱 빛나는 자리가 선명하다.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1996)

_p.158 「새에 대한 환상」


한 해의 끝에서 고요히 떠오르는 질문들처럼. 환한 빛을 더하며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돌아본다. 처음 만난 최승자 시인의 글이 내 안에 고여 있는 시간에 물길을 터준다. "상처 없는 삶과 상처투성이의 삶. 꿈과 상처.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을 더욱 굳건하게 받쳐주는 원리, 한 몸뚱이에 두 개의 얼굴이 달린 야누스의 원리이다." 버리고 흐르고 끝났으므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유를 전한다.

온 세상을 돌고 돌아 흐르다 마침내 사막에 닿은 물이 사막을 날아 다시 물이 되어 흐르길. 시인의 다짐처럼, 병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문학의 자리로 돌아오시길 바란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2021년 11월 11일
최승자

_p.189 개정판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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