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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Jan 01. 2023

달곰한 그림자

말랑말랑한 힘

그림자 / 함민복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듯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 출전 : 문학세계사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2005) 57페이지





말랑말랑한 힘에서는 어떤 시가 나올까. 시인의 말을 읽으며 시인이 시 속에 덜어 놓은 짐을 하나씩 풀어볼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시집은 크게 길, 그림자, 죄, 뻘 이렇게 4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특히 그림자에 나오는 시들이 마음에 따듯한 울림을 주었다. 검고 어둡게만 느껴졌던 그림자가 시인의 눈을 통과하니 ‘환한 그림자’가 되었고, ‘그리움’은 천만 결 물살에도 지워지지 않는 배 그림자가 되었다. 시인이 길을 걸으며 만난 다양한 그림자들은 한 편의 시가 되어 종이 위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시구에서 미소가 피어났다. 언젠가 나무나 꽃, 아이들의 그림자는 검은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무의 그림자가 유난히 짙어지는 계절. 놀이터에서 놀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늘 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꼬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떠오른 생각이었다. 금방 사라지는 존재들의 그림자가 저마다 색을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이 한결 부드럽고 다정해질 수 있지 않을까.






 ‣ 시인의 말


달밤
눈 밟는 소리는
내가 아닌
내 그림자가 내는 발자국 소리 같다

내 마음이 아닌
내 시의 마음이 활자로 돋아날 날
멀어
여기 짐을 덜어 놓는다


함민복



시인은 어머니의 허리 휜 그림자 펼쳐졌으면,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듯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시에 담아냈다. 시인의 눈을 통해 바라본 그림자에는 봄 햇살을 닮은 온기가 남아 있다. ‘따뜻하다’보다 여린 느낌의 ‘따듯하다’라는 서술어가 주는 정답고 포근한 온도가 내 몸을 달빛처럼 감싼다. 굳어 있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져 천천히 시를 음미하며 읽었다.


굴곡진 세상을 평평하게 마음에 들일 수만 있다면 세상의 그림자도 없어지지 않을까. 굽이진 길과 산, 그리고 강이 모두 평평해질 수는 없겠지만 그림자를 바라보는 눈이 지금보다는 더 말랑말랑하고 따듯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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