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의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사이 Dec 14. 2021

한겨울 새벽 공기 맛

시인 신용목의 첫 소설 『재 gray』

뜨거운 삶이 지나간 자리에 타고 남은 재의 온기

지극히 사적私的이면서도 더없이 시적詩的인
시인 신용목의 첫 소설 『재 gray』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아주 긴 이야기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일생을 그 이야기의 거미줄에 걸려 파닥이고 있는 것이다.
_p.9 이야기의 시간


신용목 시인의 첫 소설 『재』 는 해독할 수 없는 시간을 몸의 문장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뜨거운 삶이 지나간 자리에 타고 남은 재, '그림자의 몸'이라 불리는 기억의 시간을 되감아 균열이 난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이 책에는 과거와 현재가 거미줄처럼 미묘하게 얽혀있다. 내게 가장 깊숙이 들어온 친구 모의 죽음, 연인 수와의 이별, 퇴사와 이사. 주인공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몸을 옮기는 일'과 '마음을 옮기는 일', 그리고 사랑에 관해 들려준다.


누군가 자신의 한 부분을 내어주며 부딪혀 올 때, 마음의 벽에 금이 가고 문이 생긴다. "어느 날 창문 유리에 가는 금이 가 있는 것"을 보았던 것처럼. 나는 삶에서 자신을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영향을 미쳤을 금이 나아간 길을 살핀다. 잠시 머물다 간 마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마음의 일렁임을 그려본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 동안 천천히 일어난 기적을 만지는 것이다.
_p.11 이야기의 시간


고3 여름방학, "좀 더 뜨겁게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 필요했을 뿐"인 모와 나. 두 친구는 모네 시골집에서 둘만의 일탈을 함께하며 가까워진다. 그해 여름이 끝나며 모네 집에서 모의 누나 현과 조카 섭,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도 지나갔다. 멀어진 인연은 15년 만에 모의 장례식장에서 "각자 다른 시공간을 가진 우주가 어느 한순간 한 지점에서 교차되는" 만남의 순간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무언가와 결별하지 않고서는
그 실체를 만나지 못한다.
내 앞에 온 모든 것들은
상실을 통해서만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_p.94 익숙한 고통


재를 뒤적이면 날리는 불씨처럼. 사랑과 우주,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시작과 끝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수의 고별 파티와 모의 장례식이 자연스럽게 교차한다. "결국 이별의 이유는 만남이다." 자신을 내어주며 자기 삶 속에 사랑을 들이려고 했던 수. 그녀는 '이토록 지독한 모습으로 도착한 사랑'에게 "내가 이 사랑에 더 성실했으니까, 괜찮아."라고 말한다.


깨진 백자를 닮은 사람, 그 안에 고여 있는 밤. 텅 빈 마음에 갇힌 물은 밤마다 조금씩 모를 삼켰다. 모는 사랑과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을 전시하는 법을 몰랐기에. 어느 날 이중으로 자물쇠가 채워진 금고에 갇힌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 나왔을 것이다. 재가 된 수의 작품처럼 모는 고요한 죽음의 세계로 건너갔다.




남아 있는 것들은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돌아온다.
사랑은 같은 자리에 없다.
_p.125 고고학자이며 시인인


나는 상실을 통해 '내가 본 것이 내가 아는 세계의 전부'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님을 알게 된다. "어떤 열망이 자신을 끝까지 소진시킨 다음에야 찾아온" 깨달음은 끝내 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부서지고 사라지는 시간을 붙잡아 부서진 흔적을 봉합해 깨진 시간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게 모든 시간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애초부터 없어도 좋을 시간은 없다.
_p.104 제 몫의 시절


모가 남긴 글에서 "나는 다 쓰인 것 같고 다 쓴 것 같다. 충분하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과연 텅 빈 허무를 품은 마음을 전시할 수 있을까. 문득 한겨울 나무 난로의 연통을 청소하고 재를 버리는 아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불꽃이 사그라든 잿빛 가루를 텃밭에 골고루 뿌려주는 손길. 이 세상에 잠시 다녀간 누군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다만 우리에게 다녀간 이들이 부디 잘 머물다 가길 바랄 수밖에.


시와 소설의 경계에서 출렁이는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저 멀리서 이야기를 실은 파도가 밀려왔다. 파도가 다녀간 자리에 남은 기억 조각을 주워 담았다. 몸의 기억을 따라 부서지기 쉬운 마음을 자꾸만 돌아보았다. 고양이 발톱 같은 문장이 스치지 않고 흔적을 남겼다. 타버린 사람처럼, 소설이 아닌 나를 읽고 있다고.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