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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Feb 11. 2022

낮에 내리는 눈의 맛

황정은 첫 에세이집 『일기日記』

타인의 애쓰는 삶은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황정은 첫 에세이집 『일기日記』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_p.76


'일기日記'로 시작해서 '일기日記'로 끝나는 11편의 에세이를 모은 책에는 작가님을 거쳐 간 책 이야기, 어떤 날과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 담겨있다. 창비의 독서 체험 플랫폼 '스위치' 연재로 만나던 글을 종이책으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아무래도 스마트폰 화면보다 종이 위에 인쇄된 글을 읽는 게 눈이 편하다. 독서의 즐거움에는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종이책의 촉감과 두께, 무게감도 포함되니깐.


책날개에 인쇄된 '황정은'이라는 이름과 '소설가.'라는 단어를 오래 들여다봤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는 책 속 문장처럼. 작가가 버텨낸 애씀의 기록이 내 삶을 구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우리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견딘 밤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_p.59


반달터를 둘러싼 집에서 지켜본 눈사람의 생몰 과정을 연료로 날아올랐다가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는 고요에 내려앉는 글을 따라 걸었다.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 것들을 지나고. 바람이 많이 불어 다 날아갈 것 같은 어느 날, 작가가 글로 붙잡아둔 기억을 읽었다.


적당한 거리에 놓인 단단한 돌 하나같은 문장을 여럿 건넜다. 시작을 잊지 않으려 애썼지만, 생각의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널 때마다 선명해지는 감각에 잠시 책을 덮어둬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세계가 열린 것처럼 소리와 색과 감정이 분명해졌으므로 나는 그 순간을 내가 시작된 순간으로 여기고 있다. 거기서 시작되었다. 파도를 기다려, 라는 말로.    _p.66


아마 내게 가장 오랜 기억도 공포와 혐오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순간을 내가 시작된 순간으로 여긴다는 게 왠지 서러웠다. 기록은 기억하려는 의지가 담긴 행위다. 어떤 말이나 사건을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한다는 뜻이다.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행위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다.




눈송이들이 소리를 먹어치우며 내리는 소리, 소리라기보다는 기척에 가까운데, 가을과 겨울 사이 이 지역에 짙게 끼곤 하는 안개의 기척과 닮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밀도로, 눈 기척은 조금 소란하다.    _p.28


눈이 내릴 때 들리는 소리가 한 편의 수묵화처럼 그려져 소리 내 읽어 보았다. 먹으로 그린 그림 같은 문장 너머 노을이 번지는 듯하다. 작가는 어떤 날의 농담濃淡을 담백하고 고요하게 그려냈다. 소설가의 모든 글이 소설의 문장이 되는 건 아닐 테지만.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에 작가는 어떤 글을 쓸까 궁금했는데, 감각을 일깨우는 시선이 참 따듯했다.


적당한 책갈피가 드물어 책갈피를 조금씩 모으고 있다는 부분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글을 쓴 듯해서. 갓 네살 된 조카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이름 민요상. 그가 누구냐며 어른들끼리 궁금해하다가 최근에야 불현듯 알게 된 글자의 비밀도 흥미로웠다.


책의 마지막에는 "소설 한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10월의 마지막 주에 받은 고독단 북레터 '이달의 별색 인터뷰' 주인공은 황정은 소설가였다. 인터뷰에서 다음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일 것 같다고 하셨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황정은 소설가의 다음 글을 빨리 만나고 싶다.

또 보게 될 그날까지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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