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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Feb 12. 2022

4월의 나무 이파리 맛

'어림'을 사랑하는 일

'어림'을 사랑하는 일
박연준 첫 산문집 『소란騷亂_巢卵』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騷亂은
우리의 소란巢卵이 될 테니까요.
_p.14 초판 서문


어깨가 한쪽으로 조금 기운 사람, 그 어깨에 기댄 채 벽에 걸린 액자 속 그림을 응시하는 뒷모습. 두 사람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서로 맞잡은 손에서 두 사람이 바라보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기게 하는 책 표지. 책을 펼치기 전부터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박연준 시인의 첫 산문집 『소란』을 펼쳤다.

"서쪽은 기울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을 기대는 곳이다."

서쪽 방에서 기울어지는 것을 생각하는 일에서 시작한 글을 읽다가 '손톱 걸음'이라고 부르는 그를 생각하는 일에서 가만히 멈춰 섰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공들여 바로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자주 『소란』을, 여백이 자라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일렁이는 종이는 처음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겨울 바다 한 장이니까.
_p.84 겨울 바다, 껍질로 출렁이는 밤


순도 높은 그리움 한 덩이를 입장료로 들어갈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면 좋겠다. "겨울은 춥고, 높고, 길다." "지나간 것들만 따로 모아놓은 박물관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떨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혹독한 계절' 겨울, 겨울 바다에 가고 싶게 만드는 글이 종이 위에서 출렁인다. 나는 아직 보지 못한 겨울 바다, 보았지만 바라보지 않은 겨울 바다가, 책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처음은 자연스럽고, 어설퍼서 예쁘고,
단 한번이라 먹먹하기도 하다.
처음은 자신이 처음인지도 모른 채 지나가버린다.
처음은 가볍게 사라져서는 오래 기억된다.         
 _p.76 첫,


첫 뒤에 찍힌 쉼표를 어림을 돌보듯이 바라보았다.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다"라는 문장에서 소란이 고요를 기를 수 있게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속삭임이 들렸다. 문장부호도 허투루 쓰지 않은 글이라니, 첫눈 오는 날처럼 설레고 기분 좋다.

박연준 시인은 매달 연재하는 톱클래스 @topclass_topp '박연준의 응시(凝視)' 2021년 11월호 '책의 얼굴, 미리 알 수 없는_나의 첫 책 이야기'에 "쓰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의 계절을 겪는다. 그다음에야 '첫'을 가질 수 있다."라고 했다.
기회가 '또' 올 줄 몰라서 처음이자 마지막 콘서트를 여는 가수의 심정으로, 단 한 권일 테니까 '진짜 이야기'만 담고 싶었다고. '모르고 핀 꽃'이라고 부르는 첫 책. '꽃은 가고 꽃을 가졌던 자리'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사람을 일컬어 "한밤중에 펼쳐진 책"이라고 했다는데, 나도 당신도 서로의 밤에 침입해 어느 페이지부터랄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열렬히 서로를 읽어나간 거겠죠.
_p.33 하필何必, 이라는 말


『소란』을 읽으며 아빠 생각이 났다. 거리감이 느껴져 아버지로 불리기 싫다는 우리 아빠. 병아리 모이 먹는 소리가 사랑스럽다고, 닭장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함께(어릴 때부터 뭐든 함께하는 걸 좋아하셔서) 병아리 모이 먹는 소리를 들은 아침. 더 많은 병아리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알을 품는 암탉의 품에 달걀을 더하는 부지런한 손길. 얼마나 이쁜 구름색 병아리가 나왔는지, 더 크기 전에 보러 오라는 휴대전화 너머 목소리까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과한 시선과 언어는 흐르고 변한다. 지금 여기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일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긴 시차를 두고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은 미묘하게 혹은 두드러지게 변할 것이다. 계절의 변화에 옷을 갈아입는 나무처럼 의미의 결을 덜어내고 더해가다, 마음의 모서리가 다듬어진다.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글쓰기의 두려움'을 쓰다가 "끝내 시 속에서, 인생을 탕진하고야 말겠다."라고 다짐하듯 쓴 문장에 이르러 나는 박연준 시인을 편애하게 되리라, 불현듯 깨닫는다.


이 마음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지만, 나도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시를 쓸 수 있는 순하게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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