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시,일상]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처음 누군가에게 동행의 부탁을 했다. 그 누군가는 신랑이다.
부모님은 일본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한국에 그렇게 혼자 어릴 적부터 홀로라는 단어에 완벽 적응한 아이였다. 홀로이기에 모든 것은 홀로 해결해왔다.
그래서인지 결혼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부탁이라는 행위가 어색했다.
이날은 나와 연결된 인생의 파트너인 신랑이 함께 했으면 했다. 실제로 안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이건 병의 문제 이외 함께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고 교수님 앞 의자에 앉기까지도, 아니 교수님의 입이 떨어지기 전까지도 바래고 바랬다. 마치 내가 써놓은 대사가 있는 마냥 그 대사대로 나오길 바랬다.
“암세포가 발견되었어요.
시술해야 하니 시술 날짜 확인하시고 가세요”
암이라는 것인지 아닌 건지 모를 말이었지만
무언가를 등록하고 가라고 했는데 추후 진료비 내역을 보고 알았다. 거기에 암환자로 등록이 되어 있었고 이에 암환자에게는 건강보험에서 내주는 비용이 훨씬 커짐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암환자로 등록되다니…”
다행히도 암 0기여서 암세포가 있는 부분을 절제하면 된다고 했지만 절제 후 암세포가 더 퍼졌는지는 시술 후 알 수 있다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무언가 마음이 미식미식 거리는 느낌이었다.
우리 부부는 애초에 아이 생각이 없던 부부였다. 연애 때도 결혼 후에도 줄곧 생각지 않았다.
나는 임신하는 것이 두려웠고 신랑은 키우는 것에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올 초 우리에게 작은 마음의 변화가 생겼었다. 나로부터 시작된 이 마음은 나이가 들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우리가 선택을 아니다에 선택을 했지만
선택조차 할 수 없는 날이 온다면?
더 나이 들어 그때 노력이라도 해볼걸 그랬어 라며 후회하는 날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신랑을 설득했다. 딱 1년만 노력해보고 하늘이 우리에게 선물을 안 준다면 깔끔하게 포기하자고.
설득 끝에 5월 초 이사 후 임신 준비에 시작으로 임신할 수 있는지부터 검사해보기로 했었다.
근데 이 상황이 생긴 것이다. 우려했던 변수.
마음이 이상했다. 분명 심각한 단계는 아닌데..
우려했던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코앞에 다가오니 이래저래 마음이 이상했다.
그렇게 3주 후 시술하고 1주 후 조직검사 결과.
“암으로 발전할 세포가 퍼져있네요. 해결하는 방법은 자궁적출 밖에 없습니다.”
“혹시 임신 생각이 있으신가요?”
괜찮을 거라는 기대의 거품이 하나씩 하나씩 폭탄처럼 터졌다. 마음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슬픈 것도 아니었다. 힘든 것도 아니었다.
그래.. 짜증 났다. 비참했다. 씁쓸했다.
지금 자궁적출 수술할지 말지는 오로지 내 선택이다. 의사의 선택이 아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이 상황이 희망이라는 것도 안다.
근데.. 짜증 나고 비참하고 씁쓸했다.
이 상황에도 현재 걸려있는 일이 먼저 생각이 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지금 수술해야 할 일인가.. 일을 그만두면 현재 일들을 팀원들이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짜증 났다.
자궁적출을 하면 일찍 하루아침의 폐경인데..
비참했다.
나이가 있어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정말 이번해에는 임신 노력을 해보려고 했는데..
씁쓸했다.
여러 마음이 드는 가운데 교수님이 나의 선택에 도움을 주는 말을 해주셨다.
1월 재검사를 통해 암 전이 여부와 임신 가능한지에 대한 난소 검사까지 받기를 권유하셨다.
그래.. 1월이면 현재 일도 1월쯤 안정될 수 있겠다.
그래.. 1월 검사 후 암 전이가 나오고 난소 검사로 임신 불가가 나오면 수술 선택이 단순해지겠다.
생각이 단순해지니 마음이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다행히도 나는 내가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아무일 없는 듯 똑같이 보냈던 일상.
3개월이 지난 지금 슬슬 재검사의 일정이 다가오니 마음이 슬슬 간지럽기 시작한다.
간지럽지만. 두렵지만
해야 할 일을 하며 지내고 있는
다시,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