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민해 Mar 25. 2024

도서관 마을이라니?

책이 중심에 있는 사회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 사회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인문고전 스터디가 많은 사회를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철학자들은 탁월한 통찰이 담긴 글을 남겼지만, 거기에 지금 우리들의 문제와 해답이 전부 담겨 있을 순 없다. 플라톤도 공자도 인터넷이 뭔지 몰랐다.
내가 상상하는 책 중심 사회는 책이 의사소통의 핵심 매체가 되는 사회다.
많은 저자들이 ‘지금, 여기’의 문제에 대해 책을 쓰고, 사람들이 그걸 읽고, 그 책의 의견을 보완하거나 거기에 반박하기 위해 다시 책을 쓰는 사회다.
이 사회에서는 포털뉴스 댓글창, 국민 청원 게시판, 트위터, 나무위키가 아니라 책을 통해 의견을 나눈다. 이 사회는 생각이 퍼지는 속도보다는 생각의 깊이와 질을 따진다.

<책 한번 써봅시다> 장강명



친근한 외관의 도서관을 다녀왔다.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청년 영화제 출품작을 함께 보고 감독과의 대화(GV)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길래 호기심에 신청하게 됐다. 다행히 은평구의 주민이 아니어도 비회원으로 신청이 가능했고, 영화는 총 세 편이었다. 가난한 청년 커플 준형과 정은의 이야기를 담은 최범규 감독의 <손수>, 고3 수험생 민정과 그녀의 과외를 맡게 된 청년 취업 준비생 소영의 이야기를 담은 이지원 감독의 <여름밤>, 카메라를 부수고 도망친 범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각장애인 우현과 시각장애인 하얀의 이야기를 담은 김남석 감독의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까지.


근데 도서관 이름이 독특했다. 이름 자체에 마을이 들어가서 그 동네 특성인가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이 도서관 자체가 각각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연립주택 3채와 골목길을 하나의 공간으로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이었다. 지역 주민들이 도서관을 희망하는데 지자체에서는 신규 공간 문제로 이를 해결해 주지 못하자 동네가 직접 연합하여 낡은 연립주택 3채를 통합 리모델링하여 공공도서관 시설로 만든 것이다. 건축 의도 자체가 좋았던 결과물로 2016년 서울특별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같은 해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까지 받은 특별한 도서관 마을이었다(모르고 갔다가 나중에 알게 됐다).



ⓒ 구산동도서관마을 블로그



도서관 내부의 모습도 그동안 흔히 봐왔던 도서관들의 모습과 달리 독특했다. 붉은 공중전화 박스도 있고, 언뜻 보기에 친숙한 가정집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반지하로 이루어진 공간 구석에는 독립출판물 서가도 따로 마련되어 있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공공도서관에서 독립출판물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곳은 연 2회 독립출판서점을 직접 방문해 자료를 구입하고, 독립출판물 수집, 전시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독립출판물에 대한 이용자 인식을 확장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독서 생태계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GV 프로그램을 마치고 독립출판물 서가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작가들과 책을 만나니 괜스레 반가웠고, 독립서적 특유의 통일성 없는 제목과 표지, 책 모양, 디자인 등이 발랄하게 느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이곳은 '살던 주택이 도서관이 된다'는 콘셉트로 만들어진 시설이라 이름 또한 '마을도서관'이 아니라 '도서관마을'로 지었다고 한다. 마을극장까지 갖추고 있어 월마다 어린이영화와 독립영화를 상영하며 마을의 소극장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었고,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만화자료실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은평구 주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인 셈이다. 그날 참여했던 <은평청년영화상영회>는 아담하게 극장 모양을 갖춘 힐링캠프라는 장소에서 진행됐다. 세 편의 영화는 짧게는 15분, 길어도 30분 정도로 러닝타임 자체는 길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밀도 있게 잘 담겨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쉬는 시간 없이 감독님들과의 담화가 이어졌다. 두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예술적 감수성이 한껏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은평구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사실 이 동네를 올 일도 딱히 없었고), 이번에 도서관을 다녀오면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불광천의 산책로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번화가만 벗어나면 아파트보다 층이 낮은 건물과 가정집들이 많았다. 골목길에 있는 상점들도 유흥주점보다는 카페와 식당, 학원, 마트, 과일가게 등이 즐비해있었다. 동네를 구성하는 주거 인구도 가족 단위가 많아 정다운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연고가 없어 은평구를 주거 선택지에 넣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곳의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이 되면 은평구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살만한 곳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서울에 산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내가 가보지 못한 곳, 경험하지 못한 문화생활이 가득하다. 책과 관련된 다채로운 경험을 이어가다 보니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선택지가 생긴 셈이다. 더 활발한 뚜벅이가 돼야겠다 다짐하며, 도서관 마을이라는 이 친근한 공간이 공간에서 끝나지 않고, 진짜 마을이 되는 날이 꼭 왔으면 하는 바람도 슬그머니 담아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토록 정성스러운 서점이라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