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문학을 통해 나와 전혀 다른 존재가 실은 나와 똑같이 사랑하고 고통 받고 살고 죽는 존재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다른 존재, 다른 세계에 공감하면서, 내 안에 빛과 어둠이 있듯이 타자의 내부에도 빛과 어둠이 있으며, 내가 겹겹의 존재이듯이 타자 또한 한마디로 요약될 수 없는 겹겹의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문학이 가진 이 공감의 상상력이야말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 먹는 법> 김이경
원주를 다녀왔다.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뮤지엄 산>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건축물의 양식과 구조, 연결된 공간과 조형물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경이로움 자체였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글은 뮤지엄 산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동네를 가면 그 동네에 위치한 독립서점도 함께 방문하고야 마는 나의 오랜 취미에 대한 이야기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원주에 있는 독립서점을 방문했다. 처음 원주 여행을 계획할 당시, 원주에 생각보다 독립서점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었다(기대치를 너무 낮췄던 것일까). 그래서 본격적으로 여행 계획을 짜면서는 그때 봐둔 여러 서점들을 다 방문해보고 싶다는 호기로운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웬걸, 막상 서점 영업시간을 다 확인해 보니 내가 가려고 하는 날 휴무인 곳이 많았다. 결국 한 곳에만 올인(?)하고자 마음먹고 방문한 곳은 <바다에 내리는 눈>이라는 동네책방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나무와 커피 그리고 책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그 사이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부드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닥재부터 책장, 테이블, 의자, 소품 하나하나가 다 목재로 이루어져 있어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었고 두 분의 나이대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동안 방문했던 어떤 서점보다 나이대가 있으신 분들 같았다. 목공 작업도 직접 다 하신 건지, 유리창 너머에는 작업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대화를 할 때도 소곤소곤 속삭이듯 이야기를 나누시는 사장님 내외분의 모습이 이 공간을 한 층 더 부드럽고 따스하게 채워주는 느낌이 들었다.
찾아보니 이 공간이 이토록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장장 100일 동안 사장님 부부가 직접 인테리어 공사를 하며 만든 곳이었다.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는데, 카운터부터 핸드드립 바 원목 하나까지 두 분이서 나무로 직접 잘라 만들고 투명 스테인까지 꼼꼼하게 칠한 것이었다. 어느 것 하나 두 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목재로 된 깔끔한 화장실조차 어떤 나무로 만들지 고심하고 내부 작업까지 세심하게 마무리한 흔적이 있었다.
원래 카페로 운영하던 곳을 서점으로 확장해 문을 연 건 작년 6월이었다. "흐르는 물처럼 유유히 오세요. 고요히 맞이할게요."라는 문장도 참 고왔다.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 서점의 취향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알고 있는 책들, 읽은 책들, 읽고 싶은 책들, 좋아하는 작가의 책들이 많았다. 소설부터 에세이, 시, 인문학 등 서점지기님들이 어떤 기준을 갖고 책을 진열했는지 꼼꼼히 살폈다. 책장 한 줄에는 놀랍게도 황정은 작가의 컬렉션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황정은 작가는 나의 연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한 연인은 서점지기님들이 뭘 좀 아시는 분들인 것 같다며 황정은 작가의 컬렉션에 기뻐했다. "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의 책도 중간중간 꽂혀있는 걸 보고 이 서점이 더욱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가를 한참 둘러보고, 서로에게 책 선물을 해주기로 했다. 서로의 호불호를 묻지 않고 주고 싶은 책을 골라 '짠'하고 공개하는 방식이다. 어떤 책이 좋을까 한참을 고심하던 나는 연인보다 고르는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다. 취향도 중요한데, 내가 고른 책을 그가 읽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니(그는 나보다도 다독가다) 고민이 더 깊어졌다. 오랜 고심 끝에 책을 고른 나는 자리로 돌아와 연인과 서로 책을 교환했다. 그가 나에게 선물한 책은 마커스 주삭의 <클레이의 다리>라는 책인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었다. 내가 그에게 선물한 책은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이라는 책인데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커피와 밀크티를 마시며 서로가 선물한 책을 읽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나무 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던지. 서울의 복작스러움이 없어 더없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책쟁이들이라 그런가, 나중에 나이가 지긋이 들면 자신만의 취향을 듬뿍 담은 동네 책방을 열고 싶다는 각자의 로망도 마음껏 나눴다. 사장님 내외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닮은 안온한 서점을 보고 나니 그 마음이 더 요동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