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들어가는 책방
좋아하는 드라마가 있다.
<또 오해영>이라고. 스토리가 하도 기구(?)해서 꽤나 유쾌하게 봤던 드라마인데, 그 드라마에 등장했던 대사 중 유독 좋았던 대사가 있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행복한 것들을 떠올려보아요."
어쩌면 너무나 단순하지만 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문장이 아닐까. 극중 두 명의 해영이가 등장하고 그중 더 서글프게 살아가는 해영이가 읊조리는 대사다. 나는 그 대사처럼 마음이 울적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행복한 것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장소에 나를 넣어주곤 한다. 바로 서점. 마음이 심란했던 날, 다녀온 이번 서점은 <여기서울 149쪽>이라는 곳이다. 중구에 위치한 로컬서점인데, '커뮤니티가 이루는 뉴-로컬 책방'이라는 컨셉으로 서울 도시재생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직영하는 독립서점이다. 서울 곳곳에 숨어있는 동네책방, 독립서점을 탐방하는 나의 오랜 취미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고 이번에 다녀온 서점을 추천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빠다.
가족들과 오랜만에 점심 약속을 잡고서 여유로운 식사를 막 마친 뒤였다. 다음 일정이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이 근처에 있는 서점을 갈 예정이라고 답했다. 근데 막상 찾아보니 내가 평소 찜해두고 못 갔던 이 근처 서점들이 하나같이 그날 다 휴무인 것이다. 아빠는 아쉬운 마음으로 지도를 뒤적거리던 나를 가만히 보시더니 "그럼 여긴 어때?"라며 <여기서울 149쪽>을 추천해주셨다.
아빠가? 서점을? 순간 서점에 가려던 나의 계획은 까맣게 잊어버리고서 궁금증이 먼저 치고 올라왔다."아빠, 서점도 가?"라며 다소 무례한(?) 나의 질문에 그 근처에 일이 있어 갔다가 서점이 있길래 겸사겸사 다녀온 거라고 하셨다. 직접 찍은 서점의 전경을 담은 사진도 보여주셨는데, 어라?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 가보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사방에 흩날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이 충정로역에 내려 굽이진 골목길을 따라 올라갔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서점을 가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각선 길 위에 떡하니 놓인 서점은 또 처음이었다. 내 몸이 같이 기울어지는 느낌이랄까. 우산을 고이 접고 무거운 서점문을 힘차게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149쪽'은 30년 넘게 불법 판자로 되어있던 창고를 다 허물고 도시 재생 사업이 시작되면서 새롭게 건물을 지어 올려 지금의 이 건물이 되었다. 처음부터 책방을 운영했던 건 아니고, 다양한 팝업스토어를 시도하다가 '149쪽'이라는 서점으로 운영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149쪽'의 의미는 책방이 자리 잡고 있는 골목이 중림동 149번지이기 때문이라고.
<여기서울 149쪽>은 Q149라 불리는 이곳만의 시그니처 프로그램이 있다. 여기서 Q는 큐레이터를 뜻하는데, "여러분과 함께 꾸리는 큐레이션 서재입니다"라는 슬로건을 갖고 있다. 격월마다 주어지는 큐레이션 질문에 답을 하면, 선정된 답변으로 책장이 채워지는 것이다. 올해 1~2월의 주제는 "버겁고 힘들 때 숨 쉴 틈을 내어주었던 책이 있나요?"이다. 원래 운영하던 방식은 한 명의 신청자를 받아 그가 추천하는 책으로 하나의 서가를 꾸밀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이제는 커뮤니티의 의미를 더 살리고자 한 명의 지원자가 아닌 다수의 신청자를 받아 여러 명이 본인들의 책들을 추천할 수 있께끔 하는 Q149를 운영하고 있다.
서점을 가만히 둘러보니 Q149뿐만 아니라 독서모임을 비롯한 다양한 모임과 볼거리도 많았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나는 서점에서 책을 찢어'였다. 아니 이게 웬말인가. 책을 찢는다니? 이 코너는 폭우 피해로 물에 젖어버린 책들을 재판매를 할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이 도서들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생겨난 말 그대로 '책을 찢는 코너'다. 이 코너에 놓여있는 책들 중 매력적인 문장을 발견하면 해당 구절을 손으로 찢거나 가위로 오려서 붙여두는 것이다. 나는 보통 책을 읽을 때 도서관 대출이 아닌 내 책의 경우 매우 지저분하게(펜으로 줄도 긋고, 접고, 플래그잇도 마구잡이로 붙이면서) 읽는 편인데, 한 번도 찢어볼(?)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뭔가 신선한데? 어릴 때도 못 해본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서점의 공간 자체는 아담했지만 알차게 구성되어 있었다. 1관에는 큐레이팅과 함께 구석구석 책과 문장들이 가득했고, 2관은 구입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두 곳을 왔다 갔다 하며 서점에 있는 책들을 한 권 한 권 꼼꼼히 살폈다. 공간이 작아서 금방 둘러볼 줄 알았는데, 웬걸. 그곳에서 장장 2시간이 넘도록 책 구경을 이어갔고, 고심 끝에 시집 한 권을 골랐다. 시라는 장르는 나에게 여전히 난해하지만 시인의 아름다운 언어를 놓지 않고자 반강제적으로 시집을 읽는 편이다. 이번에 고른 시집은 박참새 시인의 <정신머리>라는 시집이다. 제목부터 인상적이라 손이 갔고, 한 편 한 편 읽으며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시인의 시는 굉장히 독특하고 약간의 결기마저 느껴진달까?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언어는 아닐지라도 내 스타일인 건 확실했다. 모범적이지 않아 보이는 그의 반항적인 문장들이 나를 매료시켰다.
'그래, 너로 정했다'
시집을 결제하며 서점지기님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이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이 궁금해 여쭤봤고, 어쩌다 보니 서점지기님이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경로까지 알게 돼버렸다. 서점을 운영하고 싶다는 나의 낭만적인 기대가 과한 질문을 불러일으킨 건 아니었을까를 가만히 곱씹으며 집으로 향했다. 가끔 궁금함이 과해져 무례함을 넘나드는 게 아닌가 싶어 고민이 깊어질 때가 있는데, 그날도 그랬던 것 같아서. 그럼에도 다행인 건 서점지기님도 나의 궁금증 하나에 활짝 웃으시며 묻지도 않은 것까지도 세세하게 알려주셨다는 점이다. 덕분에 나의 질문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 말이다. 실은 서점지기님도 이 공간을 혼자서 채워가시느라 입이 심심하셨던 건 아닐까 하는 나만의 상상도 키워가며 다시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길의 날씨는 여전히 우중충했지만 가방에 또 책이 담겼다. 가방은 풍족해졌고 마음은 온기로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