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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Apr 05. 2024

미세 먼... 아 아니, 미세 좌절의 시대가 왔다

2016년에서 2024년 사이에 저는 세상이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고, 새로운 미디어 기술과 선정적인 구호들(구호와 일반화는 다릅니다)을 퇴행의 배후로 의심합니다. 새로운 기술과 구호들은 서로 대단히 잘 결합하는 듯 보였고 저는 그 단단한 결합을 보며 무력감을 삼키거나 우울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제가 의심하지 않는 몇 가지 삶의 원칙들이 있는데, 막 용기를 주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어서 소박한 궁리의 기반은 되어줍니다. 제 원칙들은 개인은 존엄하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실은 믿음보다 중요하다 등입니다.

<미세 좌절의 시대> 장강명



좋아하는 것에 신성함을 담는 내가 이상한 걸까. 고귀하다 여겨왔던 무언가가 바사삭 부스러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집까지 걸어오는 늦은 밤거리가 유독 더 낯설게 느껴졌다. 급하게 가려고 지름길을 찾다가 지하철역 입구를 헤매는 바람에 합정의 밤거리를 떠돌았다. 목요일 밤이었다. 흥에 겨워 소리치는 사람들, 술에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들, 행인이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내는 위태로운 차량들, 그 혼란한 거리 속에 내가 있었다. 오롯이 혼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려다 길가에 핀 매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매화인가, 벚꽃인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소란한 세상 속 고고하게 피어있는 이 순수한 존재들이 마치 하나의 조형물처럼 느껴져 꽤 오랜 시간 들여다봤다. 집에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지하철을 타기가 어려웠다. 그 혼잡함 속에 나를 구겨 넣고 싶지 않았다. 오고 가는 발걸음, 거친 숨소리, 분노와 짜증, 자극이었다. 주변은 온통 자극 투성이었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은 이미 만차였고, 다음 차량을 기다리는 내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빈틈없이 가득 찬 공간에 어떻게든 구겨져 들어가려다 문에 끼어 소리를 지르는 한 남자. 결국 문이 다시 열렸고, 그는 보란 듯이 사람들을 밀치며 안으로 꾸역꾸역 몸을 들이밀었다. 한숨이 나왔다.


집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인데, 과연 내가 이 모든 자극 안에서 무사히 살아돌아갈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가방을 뒤적거려 책을 꺼냈다. 전자책이라 전원 버튼을 누르고 화면이 켜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래, 책 속으로 들어가자.'

마음을 굳게 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음 차량이 들어온다는 방송이 역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하차하는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옆으로 바짝 비켜선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승차하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새치기를 하며 나를 밀쳐냈다. 밀리고 밀리다 자동문이 닫히기 직전에서야 겨우 열차에 올라탔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귓가를 댕댕 울리게 했다. 다시,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읽는 행위, 그 자체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주인공들의 생동감 있는 말과 행동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과 내가 분리된 것처럼 나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장강명 작가님의 북토크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얼마 전에 출간된 <미세 좌절의 시대>라는 책으로, 예스24에서 주관하는 북토크였다. 이번 책 자체가 사회, 정치, 문화, 경제 등 현대사회의 여러 병폐를 다뤄서인지 북토크의 결도 그전과 달리 날카롭고 현실적이었다. '미세 좌절'이라는 단어도 작가님이 새롭게 고안해낸 조어인데, 현대인들이 자주 느끼는 실패의 감각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으셨다고.


북토크에서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정갈한 단어로 씁쓸한 시대상을 건조하게 말씀하시는 작가님의 모습에 쓴 웃음이 나기도, 울컥하고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책의 미래에 대한 한소범 기자님의 마지막 질문에 고도화된 정보를 축적하고 전달하는 방법에 책이라는 매체는 여전히 살아있겠지만, 그 영향력에 대해선 자신하기 어렵다는 작가님의 답변이 돌아왔다.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책을 더 이야기하고 다닌다면, 하나의 트렌트처럼 책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갈 것이라는 기자님의 말씀에 물음표가 생겼다. 그렇게 해서 유행처럼 번지는 책 문화가 과연, 내가 생각하는(혹은 바라는) 책 문화의 모습과 일치할까. 모형 책을 하나의 인테리어 소품처럼 활용하는 카페들의 모습에 회의적인 나의 고루함이 기자님의 답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질문하고 싶었지만, 질문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책의 본질이 점점 사라지는 혼미한 시대, 미세 좌절의 시대 같았다.


그럼에도 유독 기억에 남았던 순간이 하나 있는데, 작가님의 눈이 유일하게 반짝였던 순간이기도 하다. 올해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는데, 누구에게나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소개할 때만 느껴지는 특유의 반짝거림들이 있다. 이를테면 "있잖아, 이건 말이야"로 시작돼 말이 점점 빨라지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좋아하는 것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적극적인 사람이 되고야 마는 그 순수한 모습들 말이다. 작가님의 눈에서 그 반짝거림을 봤다. 미세 좌절의 시대에 맞서 시시한 시간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말씀하셨는데, 어쩌면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런 반짝이는 순간들이 아닐까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걸 내가 얼마나 좋아하냐면 말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또 쌓인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게 또 있을까 싶었다.


그 공간 안에서 다시 한번 작가님의 인기를 실감했다. 다만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무례한 참석자들의 불쾌한 언행이 나를 콕콕 찔렀다. 책을 읽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나지만, 책을 읽는다고 모두가 지성인이 되는 건 아니다. 모두가 해박한 지식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생기는 건 아니다. 그런 환상을 버린 지는 오래다. 다만 예의는 좀 갖출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가 닿을 때, 그 상대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흔히 우리가 상식적이라 생각하는 그런 예의들 말이다. 발화자가 있을 때, 적어도 그 사람의 말이 끝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릴 수 있는 잠깐의 여유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온통 시끄러웠다. 작가님의 말씀은 하나하나 마음 깊이 새기고 싶을 만큼 주옥같고 좋았지만, 의도치 않게 불쾌한 자극들을 너무나 많이 흡수했다. 좋아하는 걸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싫어하는 걸 피하는 게 내 삶에 더 중요한 가치인 만큼 앞으로 또 열릴지 모를 북토크 참석에 조금 더 신중하고 싶어졌다. 인기가 많은 사람을 좋아한 내 잘못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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