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구나
벌써 10년 전인가, 기자분들이 바쁘게 인터뷰를 하시느라 만날 틈 없이 전화로 이번 책의 로그 라인을 들려달라고 하기에, 나로선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만 대충 어림짐작만 했는데 찾아보니 한 줄로 요약된 줄거리라고, 시놉시스가 그렇듯이 역시 영화나 드라마 현장에서 쓰는 말이라고 나오더군. 다만 이제는 게임과 웹툰 소설 등 서사를 지닌 콘텐츠라면 어디라도 두루 쓰인다고 말이네.
그런데 한 줄로 요약되는 이야기라면 그냥 처음부터 서로의 시간과 가성비를 위해 한 줄을 쓰고 끝내지 뭐하러 한 권씩이나 쓰고 자빠지겠나. 그건 내 두 발로 구태여 긴 다리를 걸어 건너는 수고를 감수하지 않고 이 뭍에서 저 섬으로, 날아서 바다를 건너뛰자는 격 아닌가. 한편 두 줄 이상 넘어가는 시놉시스라고 해도 언제 어디에든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네. 세상 모든 소설에 기승전결이 갖춰진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법은 누가 만들었나. 선명한 로그 라인이나 시놉시스로 요약되지 않는 글, 이용자에게 신속 정확한 내비게이터가 되어주지 못하는 글, 심지어 목적지가 어딘지가 애초에 중요하지 않은 글을, 이야기라고 부를 수 없단 말인가?
<단지 소설일 뿐이네> 구병모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수강을 시작한 소설 강의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 강의는 작년에 읽었던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첫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서유미 소설가의 강의다.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월급사실주의 2023>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동시대 한국 사회의 노동 현장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문학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 장강명, 정진영, 이서수, 주원규 등 11명의 작가들이 쓴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서유미 작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강의 자체는 아직 3강까지 밖에 듣지 못해, 내가 기대했던 소설의 기본 구조나 묘사, 인물, 배경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읽는 존재에서 쓰는 존재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마음들에 대해 깊이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장르보다 유독 '소설'이라는 장르에 푹 빠져있는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시간이기도 하고.
서유미 작가는 "내가 왜 소설을 읽지?"라는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말 그대로 소설을 읽었던 '초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읽는 책의 장르는 사실 '자기계발서'이고, 자기계발서의 대척점에 있는 게 소설이다. 소설은 옆에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횡의 감각을 살리는 장르고, 성공하는 이야기에만 매몰되지 않는 것 또한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소설이고, 평탄하지 않은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결국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생생하게 자각하는 게 소설만의 매력이다. 그래서 소설은 "이렇게 사세요"가 아니라, 그저 "이렇게 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곤 한다. 감상은 그저 독자의 자유일 뿐. 그 과정을 활자로 읽어가며 횡의 감각을 회복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주변의 존재들을 돌아보고, 공감력을 키워가는 것 아닐까. 경험해 보지 못한 타인의 세계를 소설 덕분에 간접 체험하고, 이 체험이 서로에게 전달되면서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선순환. 이거야말로 소설의 순기능이자,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읽기만 하면 될 일이지, 나는 왜 굳이 소설을 '쓰고' 싶을까 질문하고 싶었다. 강의에서도 서유미 작가는 "소설 쓰고 있네"라는 흔한 말처럼, 소설 쓰고 싶어 하는 자신을 뜨악하게 바라보는 수강생들이 있다고 말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쓰고 있는 자신을 설명할 때, "에세이 써" 혹은 "나를 기록하는 글을 써"라고 말할 때는 조금 덜 부끄러운데, "소설 써"라는 말은 그 말 자체가 스스로를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 나처럼 평이한 사람이 '감히' 소설을 쓴다 말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은, 자책하는 마음과도 같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며 알았다. 내가 왜 자꾸 그쪽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관심이 쏠리는지를 말이다. 서유미 작가가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이유와 내가 소설 쓰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같았다. 에세이와 소설의 차이이기도 한데, 실은 에세이보다 더 솔직할 수 있는 게 소설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들을 가상의 세계와 가공의 인물 뒤에 숨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소설 쓰기의 묘미니까. 소설 속 인물은 주인공이어도, 나여도, 1인칭 주인공 시점이어도, 작가의 외부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작가는 그 인물에게 숨을 불어넣은 정도의 책임감만 있지, 작가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희미한 연결성만 갖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더 자유로울 수 있고 때로는 무책임(?) 할 수도 있다. 작가가 나무라면 소설 속 인물은 그 나무의 잎사귀 정도랄까.
그래서 글쓰기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유독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을 한 자신에게 '야, 소설은 뭐 아무나 쓰냐' 혹은 '네가 무슨 소설을 쓴다고 이 고생을 하냐' 등의 말로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정말 자기 이야기로 하는 게 아니라, '남의 이야기처럼 거리감을 둔 채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도 있다는 것. 그 마음 자체를 긍정해 주자는 것이다. 이걸 깨닫고, 이해하기까지 돌고 돌아 이 강의까지 온 것 같다. 이건 에세이와는 또 다른 결의 이야기가 될 테니 말이다. 끝으로 서유미 작가는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도 말한다.
친밀하고 내밀한 이야기는 에세이라는 그릇에, 생각하고 고민하며 내가 아닌 것처럼 거리감을 두고 싶은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으라고 말이다. 결국은 다 나의 이야기로 귀결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