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러 갈까?
사과파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날들입니다
진심을 다하려는 태도가 늘 옳은 것은 아니라고
멀리 두고 덤덤히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반으로 갈린 사과파이가 간곡히 품고 있었을
물컹과 왈칵과 달콤,
후후 불어 삼켜야 하는 그 모든 것
사과파이의 영혼 같습니다
나를 쪼개면 무엇이 흘러나올지 궁금합니다
쪼개진다는 공포보다
쪼갰는데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공포가 더 크지만
밤은 안 보이는 것을 보기에 좋은 시간일까요 나쁜 시간일까요
사실 나는 나를 자주 쪼개봅니다
엉성한 솔기는 나의 은밀한 자랑입니다
아무도 누구도 아무도
들어 있지 않은
반대편이 늘 건너편인 것은 아니라고
속삭이는 문
결말은 필요 없어요
협곡을 뛰어넘기 위해 필요한 건 두 다리가 아니에요
여기 이렇게 주저앉아
깊어져가는 계단이면 돼요
단춧구멍만 한 믿음이면 돼요
안희연,『미결』 (당근밭 걷기)
몸이 아팠다. 마음이 아프면 결국 몸이 아파버리는 기질은 여전하다. 기분에 대한 이유도 찾고 싶었다. 이름을 붙이고 싶달까. 정의 내릴 필요는 없겠지만 어떠한 기분이 올라왔을 때, (특히 부정적일수록) 타당한 이유를 찾아야만 스스로를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그래서 결국 또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관계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알듯 말듯 가까스로 부여잡고 정신을 차리는가 싶다가도 자칫 구렁으로 빠지고 마는 게 관계라면 대체 나는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정답이 없어 자유롭다 느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답이 없어 위태롭다. 고선경 시인은 안희연 시인의 「미결」이라는 시를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어떤 진심은 결정되거나 완성되지 않기도 합니다. 심지어 진심을 다할 뻔했다가 아차 하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저는 무엇이든 할 거면 확실히 해야 하는 성격인데 말이지요. 물론, 끝장을 볼 때까지요. 하지만 그것이 저의 책임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마음은 억지로 완성하려 하지 않고 미완성인 채로 두는 것이 덜 무책임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누군가는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차라리 삶이 죽음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삶은 언제나 미완성이지요. 미결이지요. 그래서 다음을, 매일을 상상하게 하지요. 넘겨본 페이지가 나의 상상과 달리 텅 비어 있을까 봐 겁도 나지만 그 또한 생생한 삶의 감각일 것입니다.
안희연 시인의 시와 그 시에 대한 고선경 시인의 생각까지 연결해 읽으면서 관계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되짚어본다. 어제의 일이 미친 여파로 인해 아주 오랜만에 악몽을 꿨다. 가볍게 흘러갈 잔잔한 파동이 아니었다. 관계에 진심을 다하고자 했던 나의 마음이 우스워지고 조롱당했던, 이용당했던 경험. 뭐 그렇다고 해서 진심에 대한 반항심이 올라왔다던가, 상처 입은 마음에 대한 푸념을 자질구레하게 늘어놓겠다는 건 아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자기연민도 적당히 해야지 도가 지나치면 그렇게 꼴사나울 수가 없다는 게 내 기저에 깔린 '염치'니까.
"진심을 다하려는 태도가 늘 옳은 것은 아니라고 / 멀리 두고 덤덤히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라는 안희연 시인의 문장에 울컥했다. 시의적절하게 마음에 닿는 시를 만난 것 같은 안도와 서글픔, 속상한 마음이 골고루 섞여 나를 괴롭혔다. "나를 쪼개면 무엇이 흘러나올지 궁금합니다"라는 문장에선 "쪼갰는데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공포가 더 크지만"이라는 시인의 목소리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나는 오히려 너무 많은 것들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 애써 꾹꾹 눌러왔던 나의 지난한 과거와 켜켜이 쌓인 감정들, 응어리진 마음, 이불로 덮어왔던 지리멸렬한 정념들이 한대 모여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불안감.
시인의 말처럼 진심을 다하려는 태도가 늘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진심을 상대가 반드시 알아줄 거라는 천진한 기대를 내려놓는 법도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고. 다만 나는 더디다. 어렵다. 무섭다. 다시 또 상처받는 게 두려워 몸을 사리게 된다. 멀리 두고 덤덤히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관계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반발심도 올라온다. 그런 관계라면 그게 무슨 관계야, 게으르고 성의 없고 책임감 없이 말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쏟아져 내릴 뻔했지만, 애써 주워 담는다. 아니다, 애초에 그 마음은 저 깊은 곳에 넣어둔 채 자물쇠로 꼭꼭 잠가둔다. 그러다 이내 던지고야 마는 관계의 단절, 그만을 외치고야 마는 고집, 아집. 뭐 그런 것들.
한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그냥 적당히 알아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간다는 건, 진심을 다해 알아간다는 건, 매번 참 어렵구나, 감정이 한없이 깎이는 소모적인 일이구나, 라고 자주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관계를 이어가야 할 만큼의 에너지가 있는 걸까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내가 그만한 그릇이 되는 인간인가 진지하게 고민하다 자조한다. 내가 뭐라고, 쳇.
나는 어제 어떤 관계를 끊어내려 했다. 상대는 그 마음을 모를 테지. 아니, 알았으려나? 여전히 잘 모르겠다. 환기가 필요했고, 좋아하는 장소를 찾았다. 여름의 끝자락에 닿아갈수록 바람은 한 층 더 선선해지고, 노을 지는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 저녁 어스름이 짙어지는 시간, 붉은빛이 서서히 빠져가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금 부여잡았다. 한 바터면 놓칠 뻔했던 그 마음을, 영원히 잃어버릴 뻔했던 그 순간, 정신을 차렸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 자신하던 내가 말이다.
너는 알고 있을까? 내가 어제 어떤 마음이었을지, 어떤 마음으로 너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지. 돌아오는 너의 대답에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답할 거면서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걸까. 그동안 너와 나눴던 모든 시간과 감정에 대한 기억을, 한순간에 모두 내려놓을 만큼, 너에게 진심이었나 보다. 그럼에도 나는 네가 (아직) 10살이라는 사실을 자꾸 잊는다. 아이를 아이처럼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하도 치를 떨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의 대화로 진지하게 다가갔던 게 실수였을까. 무엇이 되었든 억지로 하는 것은 다 싫다고 말했던 나의 목소리가 너에게 어떻게 닿았을까.
"멀리두고 덤덤히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라는 안희연 시인의 문장을 다시금 곱씹는다. 아직 이 관계에 마침표를 찍기에는 조금 이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