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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Oct 04. 2022

0. 여행의 시작

같은 궤도를 도는 독일 남자와 한국 여자


참 다른 너와 나를 이어주는 것은 오직 사랑

거실에 놓인 식물의 이파리를 노랗게 물들며 해가 서쪽으로 저물자, 선선한 바람이 살짝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앉은뱅이 안락의자에 기대어 남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느라 조금 격양된 모습이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그는 이주 후에 진급심사를 위한 적성평가와 임원면접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이 한 번에 겹쳤다며 열을 내었다. 독일에선 어떤 절차로 인적성검사가 진행되는지, 어떠한 그룹 과제들이 주어질지 그리고 임원들은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자니 점차 머리는 어지럽고 심장빨리 뛰기 시작했다. 물론 내 심장이 말이다. 내 성격 같아서는 만약 내가 남편의 상황이라면 지금 당장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준비를 시작해도 모자를 상황이었다. 이렇게 한가롭게 앉아서 잡담을 할 시간이 있나? 하지만 남편은 긴장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굉장히 여유로운 것 같이 보였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남편의 말 허리를 댕강 잘라냈다.

“그럼 네가 방금 말한 것 중 중요한 것을 요약해 적어 보자. 세 가지 일 중에 가장 큰 비중이 드는 업무가 뭐야? 어떤 항목들을 보는데? 혹시 직장 동료 중에 인성검사 해본 사람 있으면 물어봐!”

남편은 마치 내 일처럼 열을 내는 나를 보면서 조금 놀란 듯했지만 중간중간 수긍하기도 했다. 비록 지난 삼 년간 파울랜서(freelancer와 독일어 형용사 faul의 합성어, 게으른 자영업자를 뜻함)에 가까웠던 나였지만, 남편의 반응에 자신을 얻은 나는 조언에 박차를 가했다.

“이 모든 게 온라인으로 진행된다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 온라인으로 해서 더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렇게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니 이미 해는 지고 거실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나의 말을 듣던 남편은 고맙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남편은 자신의 방식대로 주어진 과제를 해나갈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잔소리는 애정으로 받아들여줄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이주 후 진급심사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날이자, 그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 찾아왔다. 나는 거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며 건너편에 있는 남편 작업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느낌만으로도 남편이 지금 몇 페이지를 발표하고 있겠다쯤은 알 수 있었다. 삼 년 전 나의 석사논문 발표 준비를 남편이 도와주었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남편의 연습 파트너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 년 전과 다른 점은, 발표 준비를 도와달라고 청할 때 말고는 나는 그가 무슨 준비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처럼 온갖 걱정을 미리 하며 호들갑을 떨지도, 부족한 면을 채우려 밤을 새우 지도 않았다. 그저 근무시간엔 일을 하고 저녁시간엔 짬을 내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한 시간이 걸린 발표가 끝나고 평가자들은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고 그 틈을 타 잠시 거실로 나온 남편은 조금은 상기되어있었지만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하는 것뿐이라며, 오히려 마음을 졸이는 나를 다독여주었다. 새로 내린 커피가 채 식기도 전 남편은 다시 작업실로 발길을 옮겼다. 다시 문이 닫히고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가 작업실 벽과 복도를 지나 거실까지 불분명하게 오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도만 식별 가능한 정도라 말의 내용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울려오는 목소리들의 톤과 분위기에서 남편이 좋은 결과를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의 온신경은 이미 남편이 있는 작업실을 향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던 손은 방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웅얼웅얼 들리는 말소리에 상상력을 조금 더하니 완벽한 독일어 문장이 귀에 들리는 듯했지만 남편의 표정을 확인하기 전까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남편이 문을 열고 내가 있는 거실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9년 전 나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바로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도는 별

연애시절 6년과 결혼생활 3년을 합치니 9년이란 세월의 합이 나온다. 그와 공유한 시간이 벌써 9년이라니. 이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차지할 만큼 긴 시간이다. 분신처럼 늘 곁에 있어주는 남편 생각하면 이 사람 없이 지내온 시간들이 희미하게만 느껴진다. 이제는 마치 온 생애를 공유해온 것 같은 유대감이 우리 둘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소한 습관까지도 알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은 물론 지나온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다. 그리고 같이 지내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가 닮아가는 모습도 많아다. 언젠가 남편과 나를 대학교 시절부터 봐 온 한 친구는 나를 보고 ‘넌 이제 정말 네 남편과 똑같아졌어.’라는 말을 다. 물론 그 말이 온전히 좋은 뜻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어조를 통해 알았지만, 어쩌랴 좋은 것만 닮을 수 없는 게 가족인 것을.


그러나 함께 지낸 기간이 길어진다고 해서 서로 공통점만 많아진다는 것은 아니다. 종종 나는 그와 내가 마치 한쌍의 쌍성(Binary star, Doppelstern)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서로를 중심 삼아 공전하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를 쓰기 때문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두 별은 이내 충돌하게 될 것이며, 반대로 거리가 너무 멀어진다면 두 별은 궤도를 이탈하여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간의 거리를 지키려는 노력 없이는 차이점을 견딜 수 없다. 예를 들어 같은 지붕 아래 생활을 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 다른 생활 리듬을 가지고 있다. 남편은 잠이 많고 아침밥을 잘 먹지 않는다. 반면 나에게는 아침 일찍 요가를 한 후 먹는 아침밥이 하루 중 가장 큰 행복이다. 남편은 음식 투정을 하는 법이 없지만 나는 입맛이 깐깐한 편이다. 남편에게 산책은 의무이지만 나에겐 휴식이다. 남편은 웬만해선 눈물을 절대 흘리지 않지만 나는 한번 터지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하염없이 운다. 남편에게 휴가는 해변에서 맥주를 마시며 누워있는 휴양이지만 나는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 물론 초반에는 이 차이점들이 거슬릴 때도 있었다. 걸그룹 에프엑스의 노래 ‘피노키오’처럼 남편을 ‘조각조각 꺼내본 후 맘에 들게 다시 조립하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녔다. 하지만 내가 남편을 내 입맛에 맞게 고치고 나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한 남편의 모습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가끔 나는 남편이라는 별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를 향해 돌진하고 싶어 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별이 충돌하는 모습을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펑! 하고 돌진해 두 별이 하나가 되면 그 순간은 황홀하겠지만, 남편과 나는 이내 큰 상처를 입고 서로에게서 멀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같은 궤도를 영유하며 더 넓은 세상을 함께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두 별이 자연스레 사라지는 그날까지 말이다.




여행의 완성은 기록

그리고 이런 고민이 가장 두드러지게 수면 위로 나타나는 순간은 바로 여행이다. 남편과 함께하는 여행은 부부생활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낯선 환경에서 둘이 힘을 합쳐 목적지를 찾아가고 그 안에서 행복과 고난을 함께 겪는 것, 인생과 꽤나 닮았지 않은가? 게다가 사실 부부는 항상 같은 목적지를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가더라도 그 동기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남편과 여행을 할수록 나는 남편 또는 나 스스로에 대해서 몰랐던 모습을 보기도 하고, 나아가서 우리 둘 사이의 현주소를 새로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남편과의 여행기를 글로 남기고자 하는 이유이다. 말 그대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잠잠해질 무렵 우리는 봄날을 만끽하며 뛰어노는 새끼 강아지들처럼 신나게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던 기간만큼 한국을 못 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따라서 1부는 삼 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 여행기로 시작된다. 지난여름 러시아 우크라이나 분쟁으로 유가가 상승하자 독일 정부는 6월에서 8월까지 3개월간 독일 전역을 이동할 수 있는 9유로짜리 모나츠 카르테(Monatskarte: 월정액권)를 도입했다. 한국에서 돌아온 우리는 이 9유로 티켓을 들고 독일 근교 여행을 떠났다. 독일 중부의 네 도시를 돌아본 이야기가 2부의 내용을 채울 것이다. 3부는 관광과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모든 것을 계획한 스페인 남부 여행의 이야기가, 4부에선 모험을 좋아하는 짠돌이 남편의 계획하에 펼쳐진 독일-네덜란드 자전거 여행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막상 집에 돌아와서야 그것을 발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네 개의 여행을 마친 지 이제 꼬박 한 달이 지났다. 여행을 하는 동안엔 새로운 경험과 그것들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 오히려 생각정리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것들은 그 의미가 더 진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마치 어둠 속에 있다 햇빛을 보면 눈부심에 눈이 멀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빛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기는 직접 그린 여행 속 장면들을 함께 연재하기로 했다. 글로 미처 표현되지 못한 감정을 그림이 채워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여행기를 적기 시작한 Wiesbaden에서 가장 사랑하는 카페, 2022. vivaJ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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