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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춘 Nov 03. 2024

호텔 '공중전화 부스'


  찬 바람이 부는 공원 가로등 밑에 빨간 공중전화 부스가 서 있다. 예전엔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찾아오는 이 없는 처량한 신세이다.
  신입생 때 일이다.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학교 앞 막걸리 집에 갔다. 안주 국물을 몇 번 리필해 가며 술을 마셨다. 술김에 종로에 있는 국일관 나이트클럽에 갔다. 자정이 되자 영업이 끝났다. 그런데 모두 집에 갈 차비가 없었다.
  그냥 걸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파출소에 들어갔다. "차비가 없는 불쌍한 대학생들인데 숙직실에 하룻밤만 재워달라"라고 부탁을 했다. 파출소장은 "파출소는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곳이지, 술 먹고 취한 대학생들을 재워주는 기숙사가 아니다"라며 야단을 치면 우리를 내쫓았다.
  그냥 또 걸었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청량리 로터리까지 왔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바람을 피할 곳이 필요했다.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부스에 한 명씩 들어갔다. 부스에 문이 달려 있어 찬 바람을 막아 주었다. 어느 친구는 부스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무릎에 박고 잠을 자고, 어느 친구는 길에 날리는 신문지를 모아 와서 이불처럼 덮기도 하고, 어느 친구는 시장에서 못쓰는 비닐을 찾아와 제 몸을 돌돌 말기도 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잠을 청했다.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점점 추워졌다. 문틈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더욱이 부스 아래쪽은 트여 있어 밖이나 마찬가지였다. 졸음에 눈이 감기고, 추위에 눈이 번쩍 뜨지고를 반복하며 우리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추운 하룻밤을 보냈다.
  공원 빨간 공중전화 부스에는 문이 없다. 전화기조차 달려 있지 않다. 부스 안으로 들어선다. 잠시 눈을 감으니 청량리 로터리 찬바람이 불어온다. 몸이 으스스 해진다.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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