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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린 Jun 18. 2023

할머니 #4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큰할머니도 어버버 거리며, 말세여 말세라고 중얼거리며 비닐하우스에서 빠져나갔다. 그렇게 홀로 남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몇십 년을 꾹꾹 참고 있던 눈물이 팡 터져 나왔다. 아주 한참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낙엽 포대 위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쯤에야 나는 비닐하우스에서 나왔다. 평생의 서러움을 털어낸 만큼,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몸의 모든 수분이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닐하우스를 나서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괜찮은 척, 원래 타고난 독한 성격인 척했던 모든것들을 벗어던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끝없이 펼쳐진 노란 논밭을 따라 걸었다. 


걷고 또 걸으며 앞으로 내 삶의 방향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하나씩 천천히 정리해 나가려고 애썼다. 그리고 할머니에게는 어떻게 사과의 말을 전할지도 고민이 들었다. 


그때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구부러진 등 사이로 뾰족한 무언가를 달고 있는 그 실루엣. 나의 할머니. 


할머니는 노을이 어느새 땅 가까이로 다가온 하늘을 배경 삼아, 논 밭 귀퉁이에 홀로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할머니 옆에 다가가 앉았다. 할머니는 불과 몇 시간 전 난생처음 손녀의 뺨을 때렸다고 하기엔,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곤 다시 시선을 논밭으로 옮겼다. 


“할머니.”

“…”

“할머니.”

“응.”

“등에 뭐가 자란 거야.”


나는 할머니가 바라보고 있는 논 밭에 똑같이 시선을 두고선 꽤나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무뚝뚝한 손녀가 ‘신경 못써서 미안해.’라는 사과의 의미가 굉장히 함축되어있는 질문이었다.

 할머니는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그저 침묵을 이어갔다. 하지만 쉽사리 안 떨어질 것만 같던 할머니의 입은 침묵의 끝에서 결국 떨어졌다.


“… 원래 자식 잃은 부모는 다 그려.”


그 말에 나는 머리를 한대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동그란 눈을 하고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붉은 노을이 얼굴에 반사된 할머니의 얼굴은 참 곱디고웠다. 그렇다. 심장을 뚫고, 등을 뚫고, 나무가 자란다는 것.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장은 근원적인 죄의식과 상실감으로 수 천 번은 더 찢겼을 것이다. 


아아. 그제야 할머니의 굽은 등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남들 앞에서 구부리고 다녀 휘어진 허리가 아니었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의 짐을 평생 지고 다녀 휘어진 허리였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에게 내려진 벌은 참으로도 무거웠나 보다. 죄를 짓지 않은 죄책감이라는 아이러니한 짐을 평생 들쳐 엎고선, 손녀의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입을 다물었던 것이었다. 


그 무게감이 어느 정도 일지는 내가 감히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등에 자란 뾰족한 나무가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이기적임이라는 장막이 걷히자, 할머니의 잔 주름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가슴속에 선명히 날아와 박혔다. 

그리곤 심장이 찢어질 듯이 시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진심을 전했다.


“죄송해요.”


절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할머니는 끙, 하고 흙을 털고 일어섰다. 


“아가. 너는 숙이며 살지 말어.”


그렇게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무뚝뚝한 손녀와 할머니 사이의 화해는 이렇듯 간단했다.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의 뒤에서 걸어갔다. 절뚝거리는 엇박자의 발걸음을 맞춰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바라본 할머니의 머리 위에는, 아주 붉디붉은 노을이 펼쳐져있었다. 평생을 왜소한 노인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하게 보였다. 붉은 노을. 분명 지고있는 해 건만, 어쩐지 할머니를 향해 다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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