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시대, 스타일리스트 영화의 탄생
1. 검술의 미학
검을 사용하는 무술을 이렇게도 "영화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검객이란 “검술에 능통한 사람”이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천영 (배우 강동원)과 종려(배우 박정민)는 검객이다. 영화 <전, 란>은 검술의 예술적 표현에 특별히 공을 들인 영화이다. 그동안 있어왔던, 검술을 소재로 한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말이다.
슬로우 화면으로 회전하는 검객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검으로 내려치는 모습을, 검을 들고 점프하는 모습을, 때로는 클로즈업으로 부분을, 때로는 풀샷으로 전체를 보여준다.
빠른 편집 호흡으로 액션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검을 잡기 위해 절벽으로 몸을 던지는 모습을, 다시 회전해서 그 검을휘두르는 장면을 슬로우 화면으로 그려낸다.
말을 타고 달릴 때 검을 든 각도, 말을 타고 달리면서 동시에 휘두르는 검의 각도,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리라. 그리고 그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들은 수없이 연습했으리라.
이 영화는 검술을 "영화적으로"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즉 편집이라는 시간과 리듬의 활용, 슬로우 모션의 조화, 회전하는 배우/피사체, 클로즈업과 미디엄 샷, 풀샷의 계산된 배열, 카메라 움직임, 배우의 이동 동선 등을 통해서 말이다.
2. 매력적인 누님, 범동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의병들.
영화에서 그들의 적은 왜군이고, 궁궐의 사대부들이며, 나아가 계급, 사회 그 자체이다.
그들은 각자 본래의 직업이 있었다. 그리고 의병이 된 후에는 자신의 직업이나 특기에 맞게 스스로 개량한 무기들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범동 (배우 김신록)은 도리깨를 개량한 편곤을 사용한다. 사당패 출신인 막내 (배우 이민재)는 돌팔매질을 하다가 이와 비슷한 활쏘기로 전향된/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숨겨진 서사를 추측컨대 임진왜란 7년을 겪으면서 의병을 이끌던 인물, 책사어른 상문 (배우 전배수)으로부터 배웠을 듯하다.
이 매력적인 누님, 범동이라는 캐릭터는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상만 감독이 드라마 <지옥>에 나온 김신록 배우의 연기를 보고, 이 영화에 꼭 캐스팅해야겠다 마음먹고, 범동을 여성 캐릭터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가.
범동은 그간 한국 영화에서 주로 재현해 온 여성의 정형성으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벗어나있다. 특히, 사극에서는 그저 왕비로, 애기씨로, 노비 또는 후궁으로서 남성 주인공의 주변부로만 머물러있는 익숙한 재현 방식 말이다. (<선덕여왕> 같은 예외적인 드라마도 있기는 하다.)
의병이 되기 이전의 범동의 서사는 영화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동안 범동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는,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천영과 그 아버지의 삶 등을 통해서 짐작된다.
범동은 웬만한 남성도 힘에 부쳐 휘두르기조차 힘들법한 편곤을 능수능란하게 휘두른다. 그뿐인가. 자신의 울분을,견해를,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전혀, ‘여성이 이런 것도 해?’라는 식의, 여성이라는 성별을 구태의연하게 강조하지 않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전복적이다.)
심지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양반계급도 아닌 “하층 계급”의 여성은 거의 사람 취급도 못 받았던, 조선 시대가 아닌가.
3. 플래쉬백의 미학
이 영화의 시간 서사 전개 방식은 무척 섬세하고 정교하다. 내러티브의 시간 순서 자체가 인물들의 감정선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대한 장치로 사용된다.
사실, 플래쉬백이라는 장치는 영화에서 자칫 잘못 사용하면 무척 촌스러워질 수 있다. 그런데 그 플래쉬백이 이 영화에서는 영화를 더욱 세련되고 매력 있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되었다.
천영은 노비이고 종려는 양반이다. 그러나 둘은 동무이다. 조선이라는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말이다. 이 두 인물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플래쉬백을 세련되게 사용함으로써 하나씩 드러낸다.
영화는 임진왜란 직전에서 시작해 임진왜란 7년 직후까지 이어진다. 그 사이사이 천영과 종려의 회상이 섞여 있다.
소년 시절 둘의 만남, 종려의 아내가 천영을 멸시하며 했던 말, 우리 아직 동무냐는 울음 섞인 물음, 왼손을 감싸는 빨간 천조각에 얽힌 기억 등이 추억처럼, 파편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이 둘의 서사가 비극적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하나씩 조금씩 드러난다.
OTT 시대, 스타일리스트 영화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