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억울하지 않을 세상
정약용의 <흠흠신서>:
그 누구도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
조선 시대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인 다산 정약용은 뛰어난 법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약 500권에 달하는 저술을 하였는데, 그 대표작 가운데 ‘흠흠신서’라는 저서가 있다. 이 책은 실제 있었던 재판 사례를 연구한 판례 평석, 법조문 분석, 법의학까지 망라한 방대한 저술이다. 이 책은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연구서라는 점에서 무척 중요하다.
‘흠흠신서’라는 책의 제목은 ‘삼가다’라는 뜻의 한자 ‘흠’을 두 번 연속해서 썼다. 백성에게 형벌을 내릴 때에는 ‘삼가고 삼가야 한다’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 누구도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이뤄야 한다는 다산 정약용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는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형사 소송 원칙과도 일맥상통한다.
드라마 ‘옥씨부인전’은 도망 노비 구덕이가 양반가 여인 옥태영으로 살면서 외지부(변호사)로 활동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노비인 구덕이의 꿈은 “늙어 죽는 것”이다. “맞아 죽거나 굶어 죽지 않고 그저 살다가 곱게 늙어 죽는 것” 말이다. 외지부가 된 구덕이/옥태영은 변론 과정에서 “형을 시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구절을 언급한다.
그녀는 “소수자”인 피고인에게 참형을 내리려는 시아버지인 현감에 맞서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며 형벌을 내릴 때에는 삼가고 삼가 함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변론하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소수자”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LGBTQ+를 의미한다. (일부 평론글에서 “성소수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성소수자”라는 용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지향해야 하는 용어가 아니라고 필자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므로 LGBTQ+ 등의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옥태영이 혼인한 현감의 아들 성윤겸은 “소수자”이며,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도 자신처럼 소외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생활을 한다. 성윤겸은 옥에 갇힌 송서인/천승휘를 찾아가 유언처럼 탄식한다. 세상을 바꾸려 했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에 절망했다고. 그가 바꾸고자 했던 세상은 그 누구도, 신분, 계급, 젠더 등 무슨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간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성윤겸과 같은 LGBTQ+캐릭터가 비중 낮은 조연급이 아닌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이는 무척 전복적인 설정이다. 실제로 이 드라마의 인터넷 드라마 톡 게시판에는 “게이티비씨“(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사 JTBC를 변형), “게이드라마는 안 보겠다 “는 등의 비난이 무수히 쏟아지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성윤겸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그러나 이룰 수 없었던 이상은 노비로서 비참한 삶을 살아온 구덕이가 꿈꾸는 누구나 평등한 차별 없는 세상을 바라는 이상과도 맞닿아있다.
다른 한편 성윤겸이 “소수자”라는 설정은, 구덕이가 옥태영으로 살면서 성윤겸과 혼인하기는 하였지만 그녀에게는 단 한 명의 정인(사랑하는 사람)—송서인/천승휘—만이 있음을, 그래서 구덕이가 그 정인을 위해 순결을 지킬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그리하여 그녀가 자신의 정인을 향한 순애보를 표현할 수 있는 필연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성윤겸과 혼인은 하였으나 성윤겸이 “소수자”라는 점을 옥태영은 이미 알고 혼인했으며 그리하여 합방은 하지 않는다라는 내러티브적 장치. 옥태영은 순결한 여자라는 내러티브적 장치.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적인 감정은 없다는 내러티브적 장치.
성윤겸이 “소수자”라는 설정은
구덕이와 송서인/천승휘의 로맨스를
더 애절하게 만드는
어쩌면 오히려 보수적인
내러티브적 장치인 것이다.
이처럼 ‘옥씨부인전’은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설정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여자 노비라는 것도 심상치 않다. 기존 사극 드라마의 여성 주인공들은 대부분, 왕가의 여인이어서 천하를 지배할 권력 다툼을 하거나 (‘선덕여왕’), 육아와 가사노동을 대신해 줄 수많은 궁녀가 있으니 출발선부터가 다른 중전이거나 (‘슈룹’), 왕의 총애를 받는 것 자체가 해피엔딩 결말인 아주 익숙한 왕가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니 말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 ‘해를 품은 달’, ‘동이’ 등).
여성이라고 해서 다 같은 여성이 아니다. 왕족이나 양반가 여성이 노비인 여성과 같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노비 구덕이에게 최고의 숙적이자 드라마 최고의 악인은 양반가 여성 소혜 아씨였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의 모든 양반들이 악인으로 그려지는 단순한 선악 구조를 표방하지도 않는다. 드라마 초반부터 명망 있는 양반 가문의 진짜 옥태영은 노비 구덕과 우정을 나누고 사회적 책임에 대해 설파한다.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드라마의 많은 인물들은 신분과 젠더의 경계를 넘어 목숨 걸고 연대한다. 서로를 지키고 돌보는 노비들, 괴질에 전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의원과 백성들, 자신의 몸종 만석을 벗이라 칭하며 대신 화살을 맞는 송서인, 노비를 양녀로 삼아준 옥태영 가문의 사람들, 구덕이의 존재 자체를 존경했던 성윤겸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도망 노비의 구명활동을 하는 청수현의 양반들 말이다. 그간 드라마에서 구덕이/옥태영처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온 힘으로 끝까지 싸우는 캐릭터가 또 있었을까. 심지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영웅이 되면서 말이다.
드라마의 첫 회, 첫 장면은 구덕이가 노비임이 밝혀져 의금부로 끌려가는 시퀀스로 시작한다. 시청자들은 구덕이의 옥태영 행세가 언젠가는 드러날 것임을 처음부터 이미 알고 시청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서스펜스를 마지막 회차까지 놓치지 않는다. 재미와 감동, 그리고 파격적인 설정까지 모두 보여주는 명작 드라마가 탄생했다.
필자가 원불교신문에 연재중인 칼럼 일부를 수정하여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