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병 환자' 되기(?) 프로젝트?
언론에 대해 공부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취재를 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다. 현재는 JTBC, 경향신문, 뉴스타파 등의 메이저 탐사보도팀 선배들이 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지만 과거의 내가 선택한 것은 '의심하기'다.
기자는 취재 대상에게 국민들이 알아야 할 객관적이고도 날카로운 질문들을 해야 한다. '왜 죽었나?', '왜 이 일이 생겼나?', '이 사건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등의 끊임없는 의심으로 크로스 체크를 완벽하게 해낸 후 질문을 해야 한다.
난 이 '의심하기'를 습관화시키기 위해 인간관계에서도 상당히 많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나 가족 또는 지인들의 언행에 대해 '왜 웃나',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등을 멈춤 없이 확인했다는 것이다.
상당히 기계적인 인간관계가 지속되자 자연스레 사람들과의 거리도 멀어지게 됐다. 그러나 취재 또는 인터뷰를 할 때는 상대방이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와 하고자 하는 말을 금방 파악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다행이게도 난 우정과 연애보단 일을 더 중요시하는 이기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후회하진 않았다.
사람들을 수 없이 만나다 보면 대충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그 사람만이 가진 말투와 행동이 있다. 그 사람만이 가진 성격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이다.
생각보다 어렵네?
오전 회의 당시에는 기획한 취재 일정을 보고한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곧이곧대로 발언을 시작한다. 인터뷰를 할 때는 최소 50가지의 질문을 준비한다. 내가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계획까지 짠다.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하면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머리를 굴리면서 새로운 질문을 한다. '진짜' 답을 얻어내기 위해 유도하면 쓸 데 없는 대화들은 지워버린다.
이처럼 '기자질'을 하면서 의심하기는 나에게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가끔 데스크에서 취재를 시키면 '왜 시키는가?'라고 생각한다. 답은 보통 하나다. '아 그놈의 광고비'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취재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데스크와의 싸움을 지속하면서 고집불통처럼 내가 원하는 취재만 해왔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취재를 하기 전에도 나에게 물음을 던진다. 취재해야 하는 이유와 보도를 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이가 누구인지를 고민한다. '을'이라는 약자를 위한 취재가 아니라면 때려치운다.
그렇다면 누가 대한민국의 '약자'일까? 크게 노동자, 소상공인, 여성 등이 있다.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이들은 대부분 갑질을 당한다. 기업과 공공기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집단이 큰 곳의 노조를 취재하다 보면 아주 가관이다. 겉으로는 복지와 상생을 외치며 '어디에 수십억을 기부했다'라는 보도가 줄기차게 나온다. '아 역겹네'라는 편파적인 생각을 갖고 취재를 시작한다. (초년병 시절엔 객관적이지 못한 주관적이고 불공정한 보도를 할 때가 많았다.)
취재를 마치고 보도를 한 이후 기업이 '아야'하는 기사들은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광고비가 기다린다. 데스크는 '경계'가 아닌 '딜 태세'로 촉각을 곤두세운 후 나를 침묵의 울타리에 가둔다.
의심을 했을 때 '아 회사가 어렵나?', '간부 중 누가 날 싫어하는가?'라는 등의 오만가지 생각을 한 후 사내 생활도 편치 않게 이어간다.
조금 들었던 생각은 '잘못된 '의심하기'였을까?'라는 작은 깨달음이었다.
모난 돌 강제로 깎아버리기
'너 나한테 뭘 바라냐'라는 질문을 항상 하고 다니자 인간관계까지 틀어졌다. '의심병'에 걸린 듯한 상황이었다. 친구들이 아무리 신뢰할 만한 근거를 들이대도 믿어주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곤란을 당하게 되고 멀어져 갔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속이는 사이클이 지속되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도 편집증은 아니지만, 유난히 성격이 특이하게 까다로운 사람들 중에는 편집증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편집증이란 사람과 환경에 대해 불신하고 의심하며 살아가는 정신 현상이다. 타인들이 자신을 박해하거나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음모를 꾸민다는 비현실적 생각에 시달린다. 의심적 생각은 스스로를 두려움과 불안에 떨게 만든다. 이는 오늘날 정상인부터 정신병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정신 과정이다.
의심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에 책임지지 않고, 타인이나 외부 요인에 책임을 전가하고 비난한다. 이처럼 편향된 자기식의 고집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피해망상, 불안, 공포, 분노, 불행 등으로 채우며 살아간다.
이들은 의심이 많고 남을 경계하고 적대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자신을 속이거나 배반하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화를 잘 낸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속임수나 나쁜 동기를 숨겨놓고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늘 그것을 찾아내는데 몰두해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곤 한다. 그래서 이들은 상대방이 화를 내면,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다는 생각에 의심과 경계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부정적인 자존감이 때문이었나? 항상 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해, 타인까지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부정성이 의심을 유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타인을 의심하는 경향은 곧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기반을 둔다. 자기 자신을 긍정적이지 못하는 관점은 열등감 내지 무가치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의심병 환자는 심리적 안전은 그가 박해받는 존재라는 인식에 의해 위협받지만, 타인에 대한 비난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이 유약하다’는 열등감을 덮어 준다. 이런 이유로 자신을 타인에 대한 비난이라는 자신의 방어체계 안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노력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안전과 위험이라는 개념이 대립적으로 작용한다.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안전을 요구하고,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해 만족을 추구하므로 심리적 위험을 해소하려 한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기 꺼려하는 버릇부터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대화를 시작하고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마음의 문'을 열기로 했다. 그렇게 2018년부턴 '전혀 다른 나'로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