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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희 Apr 16. 2020

나의 노동은 이토록 선명한데 가끔은 그림자가 되는 기분

정희의 일기#2

  

너의 첫 일기를 받고 우리 작당모의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걸 실감했어. 새로운 일을 벌인다는 것은 늘 가슴 뛰는 일이야. 그 뒤의 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움직이지. 결의와 실행력 덕분에 ‘나’로 살아온 시간을 쌓아왔다고 생각해.      


우리는 왜 그토록 밤에 안 자기 시작했을까.

밥때와 아이들 등교와 하교에 맞춰 살아지는 그 숱한 ‘낮들의 시간’ 들을 보자고. 어깨에 떨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기 바빴지. 기계처럼 떼인 시간들을 밤에라도 거둬들이려는 마음이 클 수밖에.


코로나로 인해 바뀐 일상이지만 낮은 느슨하게 새벽은 여전히 치열하게 보내고 있어. 책방을 닫고 지낸 지 58일째구나. 꼼짝없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보니 멘붕이 올 지경이야.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라는 새로운 연대가 등장하더니 뉴 노멀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와. ‘이전의 삶’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겠다 상상하면 그동안 해 왔던 일들에 마구 혼돈이 오는구나.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집에서 나는 여전히 엄마야. 끼니는 재깍재깍 찾아오고 먹고 싸는 일은 거를 수가 없어. 24시간 아이들과 밀착 생활하며 최소 120 끼니를 넘게 차린 셈이야. 한 공간에 엄마 사람과 일곱 살, 열세 살의 인생이 뒤섞여 돌아가. 놀며 부대끼며 오만가지 감정으로 공존하는 방법을 다시금 체감하고 있다. 낮과 밤 이중 삶을 오가느라 비몽사몽 눈을 뜨지. 늦은 아침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고 있어.     


며칠 전 아파트 장 서는 날 아이들 손 잡고 밖으로 나갔어. 한 바퀴 돌면서 간식거리를 조금 사고 반찬가게에 들렀어. 그 옆에는 오이소박이가 큰 통에 맛깔스럽게 담겨 있어서 얼마인지 물었어.

“하나에 천 원이요.”

“네? 이거 하나예요?”

“네.”

오이 한 개를 보통 세 등분 나누잖아. 그중 한 덩이가 천 원이라는 거야.

속으로 ‘헐. 왜 이리 비싸? 한 접시만 담아도 만원. 안 되겠네.’하고는 그냥 집으로 왔어. 다음날 우연히 TV를 보는데 오이소박이를 담그는 장면이 나오지 뭐야.

침이 고이는 순간 저걸 내가 담가보리라는 발동이 걸렸지. 오후에 마트로 갔어.

오이 10개와 당근 1개, 부추 한 봉지를 사는데 9850원이 들더라. 양념 비율을 레시피대로 만들어보니 다행히 먹어보던 맛과 비슷하더라고.

큰아이 호영이가 엄지손가락을 들었어. 뭐든 맛있을 나이이긴 하지.

“직접 담그길 잘했다. 이거 봐, 김치통이 가득 찼잖아. ”

저녁을 먹으며 나는 엄청 뿌듯했고, 가족들 앞에서 아낀 돈까지 어필했지.      


그 날 은근히 고단하더라. 김치는 엄두를 못 내는 데 오이소박이는 그래도 간단할 거라 생각했어. 장을 보고 재료를 씻고 저리고 다듬고 썰고 채우고 하다 보니 그것도 힘들더라고.

반찬가게 주인이 생각났지. 우리는 누군가의 수고를 먹고사는 존재라는 것을 역으로 느껴본 셈이었어. 나의 수고는 3일 만에 텅 비었단다.

사실 남은 재료 냉장고에 썩혀 버리느니 그 돈 아끼자는 심산에 반찬을 사기도 해. 하루가 바쁘게 돌아갈 때에는 시간 줄이자고 한 번씩 사고. 효율과 편의에 돈이 오가지만 거기 담긴 수고를 헤아려본 경험이었어. 그분을 보면 조금 다정하게 웃어볼까 해.

너에게 오이소박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할 줄 몰랐구나.     


노동의 대가가 이렇게 정당하게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잖아. 애석하게도 우리가 매일 하는 가사노동은 그렇지가 않아. 제로로 세팅되는 살림살이들이 매번 덮쳐오는 기분이지. 열심히 몸을 굴려야 제자리이고, 조금이라도 멈추면 심각하게 티가 나. 나의 사지가 움직이는 노동은 이토록 선명한데 왜 보여지지 않을까.      


몇 해 전 시댁 식구들하고 여름휴가를 간 적이 있었어.

우리 가족, 어머님, 형님, 시누이 가족 이렇게 모두 펜션에 모여 휴가를 즐기고 있었지. 아이들이 있으니 수영장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하루를 보냈어.

어머님은 1박 2일 여행에 보름치 반찬을 바리바리 챙겨 오셨어. 놀러 와서도 누군가는 밥을 하고 과일을 깎고 설거지를 해야 하지. 어머님은 쉬지 않고 그림자처럼 움직이셨어. 노는데 행여 신경 쓰일라 쓰레기 정리까지 말끔하게 해 놓으시는 거야. 그렇게 분리된 존재처럼 나도 어머님 옆에서 일을 거들었지. 며느리니까. 더는 같은 여자이자 엄마라서(?).

 다녀와서 남편에게 말했어. 다음번 여유되면 어머님은 친구들하고 휴가를 보내드리는 게 좋겠다고.      


누군가는 그 수고가 너무 잘 보이는데 누군가에게는 안 보여. 한 공간에서 단절된 느낌이 든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당연하게 밥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노동은 소외된다’라는 작가 은유의 말을 뼈 속 깊이 실감해.

매 끼니가 뚝딱 차려진 밥상이 아니라는 걸 설명해야 보이는 걸까. 정성스러운 집밥은 무조건 엄마 손으로 차려져야 하는 것도, 사서 먹이면 ‘부족한 엄마’라는 이 불편한 압박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싶구나.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모성이란 열심히 할수록 미끄러지는 주체 없는 신화가 아닐까.     


남편과 함께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나누어서 한다 해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각지대는 내 몫인 경우가 많아. 가령 저녁을 먹으면서 아침밥을 고민해. 아이가 아프면 나의 모든 일정이 올 스톱이 돼. 나을 때까지 때맞춰 약 먹이고 컨디션을 챙겨야 하지. 학교 선생님 전화도 받아야 하고, 학원 선생님 전화도 받아야 해. 시시 때때로 놀자고 조르면 저질체력으로 놀아줘야 하고, 손톱 발톱도 자랐는지 봐야 하고, 입을 옷과 먹을 간식을 챙겨. 안절부절못하며 움직이지 않으면 일도 육아도 살림도 저절로 굴러가지 않잖니.


나를 움직이는 힘은 가족을 위한 '사랑'인데 의무에 잠식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한 사람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으려면 ‘헤아리는 마음’ 없이는 어려울 것 같아.

‘역할’ ‘엄마다움’ ‘당연함’ 이런 바깥언어 대신에 ‘여기, 사람 있다~’라고 나의 언어로 끊임없이 말을 해야겠어.


어쩌다 이렇게 노동에 민감한 여자가 되어있네.

책방 노동에 대해서는 할 얘기 진짜 많은데. ㅎㅎ

동감!이라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구나.

자, 조금 이따 하루를 맞이 해야지.     


정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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