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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희 Sep 12. 2020

그 해, 그 방

W살롱 시즌2. 쓰는 여자


두 살, 일곱 살, 아홉 살이 된 아이 셋과 불투명한 생계를 홀로 떠안고도 작가가 되고 싶었던 도리스 레싱. 전쟁 같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아들을 키우며 인간에 대한 고통을 문학으로 이어간 수전 손택.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커피 한잔을 끼니 삼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을 썼다던 조앤 K 롤링. 

유난히도 두렵고 착잡했을 그녀들의 절박함에서 나의 삶을 떠올리게 되었다.     


2012년 그 해.

나는 대구를 벗어나 서울로 올라갔다. 남편 사업이 갑자기 기울었고 시어머니 집에 세 식구가 얹혀 산지 2년째 되던 해였다. 서울로 가서 나도 돈을 벌어 오겠다고 남편에게 며칠째 얘기를 꺼냈다. 결국 그렇게 올라가게 됐다. 세 평짜리 반 지하 원룸을 얻었다. 결혼 전 내가 살던 길동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었다. 가져온 짐을 아무리 쌓고 올려도 방은 여전히 둘이 누울 공간밖에 되지 않았다. 두 돌이 채 안된 아이와 단 둘이 보내던 첫날, 나는 아이를 한참이나 안고 있었다.      


1년 동안 언니의 피부샵에서 일을 했다. 나는 언니를 정말로 좋아해서 서슴없이 의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타지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아이를 데리고 혼자 지낸다는 것이 여간 녹록지가 않았다. 덩치가 큰 손님 전신 마사지를 하면 기가 쏙 빠져나갔다. 일을 마칠 때 즈음이면 아침과 다른 피폐해진 내가 저만치 서 있었다. 몸의 고단함이야 소주 몇 잔으로 달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어린이집 종일반에 홀로 남겨져 있는 아이를 데려올 때마다 저린 마음은 무엇으로도 달래지지 않았다. 세 살 배기 아이의 저녁은 대부분 먹기 편한 주먹밥을 사다가 언니 가게에서 때워야 했다. 얌전하게 앉아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며 쓰린 마음을 속으로 붙잡았다.     


2012년 그 방, 아이와 함께



그 해, 그 방에서 나는 신경숙의 「외딴 방」, 최명익의 「비 오는 길」 두 권의 책을 읽은 게 전부다.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

왜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에, 우리들,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인지.’ -외딴방, 47-     


그 방에서의 첫날. 무자비한 쓰나미가 어느 날 나와 아이를 이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고 생각했다. 20대를 모조리 보낸 꿈 많고 열정 많았던 청춘의 내가 있던 서울의 풍경은 무채색으로 변해있었다.      


일상은 분망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가고, 밤이 되면 돌아와 아이랑 누워 ‘아빠 힘내세요’ 노래를 부르다 잠이 들었다. 그 순간은 둘이어서 힘이 났고, 둘이어서 아팠다. 모든 하루는 어린이집, 반영구, 마사지, 휘황한 밤 골목, 창문 틈 발걸음 소리로 기억된다.     


주말을 앞둔 밤. 나는 그 방에서 「비 오는 길」을 펼쳤다. 책 속에는 병약한 몸으로 2년 동안 공장을 드나들면서 밤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병일이 등장한다. 그가 홀로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며, 자기 소외와 비루함을 견디는 시간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속물근성 가득한 사진사는 모아둔 돈 없이 책만 사는 병일을 어리석다며 채근한다.


병일을 보며 잠시 잊고 있었던 ‘읽는 삶’을 떠올렸다. 변두리, 시골 어느 곳이라도 좋겠다. 가족이 함께라면 방 한 칸이어도 좋겠다. 그곳에서 나는 햇살 받으며 낮 시간을 고요하게 책이나 읽을까. 어디에 살든 책은 택배가 가져다줄 테니까. 평범함을 이루는 것들에 멀어져 있던 나는, 그것만으로도 갑자기 행복감이 밀려왔다. 상상만으로 간절해진 밤이었다.

‘읽는 삶’을 꿈꾸던 나는 지금 원 없이 책을 읽는 책방지기가 되었다. 평생에 이토록 많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그 두 권의 책만큼은 나의 절박함이 묵직하게 스며든 그 해, 그 방처럼 또렷하다.      


그 해를 떠올려 글을 쓰는 건 처음이다. 한계를 마주하며 글을 썼던 그녀들로 하여금 나의 그때로 돌아가 한 줄기를 써보자고 펜을 들었다. 무뎌진 내 감정이 그때로 돌아가려니 한 페이지를 채우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절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시간을 고통이나 불행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쓰면서 알았다. 거기에는 당연히 웃음도 있다. 그러나 기쁨 하나, 슬픔 하나에도 세밀하게 분쇄된다. 더 예민하고 깊고 강렬한 감정을 경험한다. 없던 힘과 용기가 여기에서 생겨난다고 믿는다. 자연스럽게 삶의 변곡점이 된다.      


읽는 인간과 쓰는 인간 사이에 ‘내 삶’을 집어넣고 산다는 말로 나를 소개한다. 지금 이렇게 읽고 쓰는 나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앞으로도 여전히 이 자리에서 온전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w.살롱 에디터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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