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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희 Nov 09. 2020

B전공자는 그림을 배웁니다(×) 그립니다

W살롱 시즌3.NOON

그리고 싶었던 ‘언저리 삶’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먹은 순간에는 늘 배울 곳을 찾았다. 취미미술학원, 문화센터, 대학교 사회교육원, 화실을 알아보고 과정을 등록했다.

중학교 미술 시간 짝꿍 얼굴 그리기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선생님이 뽑은 3점의 그림 중 내 그림이 포함되었다. 아이들이 보는 칠판 앞에 전시되었고 나는 박수를 받았다. 난생처음 받았던 인정은 어른이 된 후에도 그림 언저리 생활을 이어가는 동력이 되었다.

나는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다. 당시 대량생산에 맞춰진 제품에 디자인을 입히는 사람들이 멋져 보였다. 순수미술과 비교하자면 산업인력을 배출하는 교육을 받은 나는 비전공자다.

삶에서 그림에 대한 갈증은 곳곳에 박혀있다. 결혼 전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 후 문화센터를 등록하고 초상화를 그렸다. 조금 더 잘 그리고 싶어 「인체 해부와 묘사법」이라든가 「얼굴과 손의 기법」을 구비했다. 이론은 왠지 어렵고 따분했다. 단지 꾸준히 그리겠다는 마음으로 집에 이젤과 스케치북을 갖춰 놓고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대학교 사회교육원이나 주 5일 화실을 등록해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배우는 동안에는 기초과정을 반복하거나, 나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펼치기도 전에 꼭 인생 변수가 생겼다.     



기본기는 자격지심을 낳고

일반인 또는 비전공자가 이미 그림을 배우기로 마음먹을 때에는 크게 두 가지를 염두한다. 없는 기본기(기술)와 그림 그릴 자격(전공)을 말이다.      

기본기에 대한 두려움은 ‘재능 없는 나 같은 사람도 그릴 수 있을까’, ‘어릴 적에 그림에 대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가능할까’, ‘기법이라도 터득하고 그려볼까’,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비웃으면 어떡하지’하는 불안한 마음들을 떠올리게 한다.

적어도 그림을 그리려면 뛰어난 데생력과 사실적인 묘사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관찰할 수 있는 눈’과 ‘표현할 수 있는 손’을 장착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아기가 엄마 눈빛을 바라보며 말을 배우듯, 스승에게서 가로선, 세로선, 나선형 선긋기를 배운다. 그다음 단계는 보이는 세상을 사각형에 넣어 구도를 잡는 방법, 명과 암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쯤에서 첫 번째 포기 단계를 맞닥뜨리는 경험을 한다.


‘휴~! 갈 길이 너무 멀 구나. 역시, 난 그림은 안 맞나 봐.’

그리기도 전에 좌절을 맛본 사람들은 납작해진 마음으로 있던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기본기 다지기


기본기의 두려움이 내 안에서 작용한다면, 그림 그릴 자격을 따지는 일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온다. 최소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잘 짜인 커리큘럼이 있는 곳에서 수료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계의 아줌마 부대’라는 말이 있다. 주부로서 과거 미술대학을 졸업했으나 자녀양육 때문에 뒤늦게 50,60대가 되어 화단에 데뷔하는 작가를 칭한다. 대학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가진 재능으로 뒤늦게 각종문화센터를 통해 화가로 데뷔하는 이들은 ‘문화센터 화가’라 부른다. 예술계에서는 모두 인정하지 않는 아마추어이다. 창작과 예술의 영역은 특히 전문가와 전공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며 그들로부터 삐딱한 시선을 여전히 견뎌야 한다. 미술협회나 제도권 대학이라는 전형적인 틀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록 그림 그리는 행위는 세상 만만치 않은 일이 된다.

그림, 그게 뭐라고.     



틀 밖 세상은 넓다.

어느 날 봉덕동의 한 골목을 지나다가 작은 공간을 발견했다. oo화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섯 평 남짓 한 그곳이 궁금해서 안을 들여다보는데 그 흔한 이젤이 없었다. 기다란 one테이블에 몇 명이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대개 화실이라 하면 수강생이 쓰는 이젤들, 쌓여 있는 캔버스, 손 때 묻은 도구들, 유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풍겨야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온 날 내 안에 있던 견고한 틀 하나가 깨졌다.      


2018년 4월, 책방에서 그림모임을 꾸렸다. 그림 그리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일주일에 한 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나의 그림’을 그린다. 처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주로 묻는 말들이 있다.    

 

“그림 잘 못 그리는데 괜찮을까요?”

“수업해주시는 분이 없다고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나요?”     


명확한 커리큘럼과 가르쳐 주는 선생님 없이 다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린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진 틀대로 따라가거나 배우는 데에 익숙해하며 안정감을 느낀다. 공통으로 그려야 할 주제나 대상도 없고 정해진 도구도 없다.

처음의 막막함은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부터 시작된다. 그 대상이 자연인지 인물인지 사물 인지도 내가 정한다. 그다음 도구가 붓인지, 펜인지, 색연필 인지도 본인이 정해서 가져와야 한다.

처음에는 스케치북 앞에 어색함을 마주한다. 오랜만에 낯선 나를 경험하는데 그 ‘낯섦’은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보며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나를 만나는 일이다. 다음으로 온전한 몰입의 시간이 따른다. 우리는 매시간 서로의 그림을 봐주고, 각자의 연결된 이야기를 나누고 마무리한다.

이 자리에는 그림에 대한 자격과 배제, 평가와 견제가 없다. 다만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우선인 사람들이 모여 ‘나의 그림’을 그린다.     

서재를 탐하다 책방모임 <그림 그리는 오후>



스스로 판을 벌이다.

현재는 다양한 멤버들이 있다. 전혀 다른 직종에 있거나, 개인 창작에 몸담고 있거나, 무언가 짓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꾸준히 그리다 보니 매주 그림들이 쌓여갔다. 재미난 일이 없을까. 궁리 끝에 멤버들과 머리를 맞대었다. 그 결과 <1주 1그림 프로젝트>를 만들게 되었다. 매주 그림 1점을 완성시켜 6개월의 진행과정을 담아 작품집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일주일에 한 번 완성된 그림들은 웹진에 업로드해서 공개한다. 우리는 서로 인터뷰도 진행 중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고유한 이야기를 담아 작품집에 수록할 예정이다.

번듯한 갤러리를 빌려 전시회를 열지 않아도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 시도는 다양하고 마음만 먹으면 펼칠 수 있는 플랫폼은 많다. 화가보다 삶을 예술로 만드는 일상 예술가가 많아지면 좋겠다. B급, B전공자가 눈치 보지 않는 세상은 참 재미나겠지.

<1주1그림 프로젝트> 작품집 출간 편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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