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ne Aug 21. 2024

빛이 허락되는 곳

1. 영원을 바라는 마음

@naenaeswagqueen


철저히 무감각해지기로, 그 무엇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깊은 애정을 주지 않기를 해인은 늘 바래왔다. 아니 다짐해 왔다.


그런 경우에 빠지게 되면 그 후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죽는 것보다 어려웠다. 아예 사라져야 끝날 것 같은 막막함. 실제로 손목을 긋고 약을 먹기도 했었다. 해인은 그런 자신 스스로를 나약한 인간이라 자책했으나 시간이 지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것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고 온마음을 다했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 과정은 몸부림쳐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봤을 때 상처받기까지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리하여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었다.


참으로 애달프게도 상대방이 변심하거나 배신하거나 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그 사랑은 진정성을 갖는다. 아무런 동요 없이 한결같은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 단지 그러하기 위해 노력하여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사랑이겠다. 사랑은 의지의 문제. 해인은 홀로 또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웃음이 난다. 사랑하지도 않을 거면서 어떤 존재에게도 마음을 깊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사랑에 대해 운운하다니.


해인은 요즘 퇴근길에 동네 편의점에 들러 마실 맥주를 골라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것이 좋다. 그저 그런 큰 동요 없는 나날.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지도 누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평소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방영하는 날인지 기억을 더듬으며 집에 도착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뒤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티브이를 켜길 바랄 뿐이다.


누군가를 갈망하고 함께 있기 원하는 마음을 죽여 버렸다. 이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기쁨은 순식간에 홀로 있고 싶은 마음으로 변한다. 언제부터였지. 해인은 늘 한결같이 무표정하게 바코드를 찍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좋다. 눈을 아예 마주치지 않으니 그저 카드만 단말기에 잘 껴 넣는 것이 해인의 해야 하는 일의 전부다. 만약 이 아르바이트생이 평소와 다르게 안부를 묻는다거나 오늘은 평소와 다른 맥주를 산다고 아는 체한다면 해인은 곧 머릿속으로 다른 편의점을 생각해 내고 앞으로는 그곳에 들려야겠다는 다짐을 할 것이다. 그렇게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아니 아예 그저 사물을 대하듯 마음을 배제한,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일 따위는 없는 그런 철저한 계산. 해인은 전공도 문과계열이고 수학과는 관련 없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는 나이를 먹으며 점점 더 수학을 좋아하게 됐다. 사칙연산 또는 단순히 수를 대입하는 방정식. 시간을 거슬러 학교에 다시 다닌다면 수학을 제일 좋아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아무 이유 없이 싫어질 수 있다는 것. 사람들이 반려견을 키우는 이유는 반려인이 먼저 배신하지 않는 이상 아니 설사 배신한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한결같이 신뢰하고 사랑을 보여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사랑을 경험한다면 세상을 헛되이 산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이 해인을 이토록 무감각해지도록, 사랑이란 것에 희망을 갖지 않도록 만들었을까. 해인은 이제 그런 상태가 된 자신이 너무나 만족스러운데 이토록 편안한데 맥주를 마시다 잠든 어느 날 꿈에 왜 그녀가 나타난 것일까. 그녀는 왜 아직도 그렇게 생생히 자신에게 찾아오는 걸까. 무의식에서는 그녀를 여전히 원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저 꿈일 뿐이라고 하기에 해인은 정말 단한순간도 그녀를 떠올리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해인에게 마음이 변했다는 한마디로 오랜 시간의 관계를 정리했다. 해인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지도 않은 채 그저 마음이 변했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식어버린 차처럼 더 마시기 힘들어진 온도의 관계. 무엇이 문제였을까. 해인은 그녀를 어떻게든 붙잡고자 매달렸다. 당연히 그럴수록 그녀는 더 차갑게 더 멀리 달아났다. 그런 그녀가, 왜 이제와 다시. 기분이 나쁘기보다 허무하다. 도대체 왜.


시간이 흐르고 나서 해인은 그녀가 그렇게 단칼에 자신을 끊어낸 것이 좋았던 일인지 아니면 천천히 마음을 접어주어 해인에게 마음을 추스를 정을 뗄 시간을 주는 것이 나았을지 생각했다. 글쎄 아마 이건 해인의 바람이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해인에게 사랑은 아니더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로 그녀를 단념할 수 있게 기다려주었다면 어땠을까. 마음을 주었는데 그 마음을 골키퍼가 저 멀리 뻥 차버리듯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뒤로 조금씩 멀어질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그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면. 글쎄 아마 이렇게 깊은 상처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에게 사랑은 선택이고 그것은 피할 수 있는 것이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해인의 집에는 생명이 붙어있는 것은 화분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은 오직 해인과 냉장고 속의 유산균이 전부다. 철저히 마음을 줄 대상을 차단하고 그 어떤 것도 들이지 않았다. 배달음식에 함께 온 상추더미에 숨어있던 달팽이가 최근의 유일한 불청객이었고 그는 그 달팽이를 조심히 상추 한 장으로 싸서 창문을 열어 풀이 있는 곳에 안전히 내려주고 어떠한 마음으로 동요도 일으키지 않도록 그 어떠한 책임도 느껴지지 않도록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그의 생활반경 안에는 어떠한 온기도 없다.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오직 그뿐이다. 해인은 그것이 마음에 든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기도 미워하기도 방치하기도 감싸주기도 온전히 스스로 해내며 더 이상 어떠한 누구의 영향도 받고 싶지 않다.


사실 해인은 사랑하는데 그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었다. 마음을 주었다가 다시 받는 법을 배우지 못해 아니 뜨거웠던 그 마음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포기했을 뿐.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이 영원하지 못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비극이었기에 그저 지금의 상태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다.


냉소적이고 영 인간미가 없다는 직장동료나 가족의 평에도 그저 그런 것이 적당하다고 뜨겁거나 과하지 않아 다행이라 안도한다. 해인은 어쩌면 상처받기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이제 믿지 않는다. 해인은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이 한때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한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랑은 철저한 노력이고 기대를 갖지 않으며,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굳이 아쉽지 않은 그런 상태여야 한다. 무언가에 맹목적인 것은 좋지 않은 결말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보다 다른 대상을 더 잘 안다거나 이해한다거나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종교적 가르침도 결국 인간이 할 수 있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기에 요구된다.


인간은 어쩌면 그리 천연덕스럽게도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할까. 그리고 늘 사랑할 대상을 바랄까. 그 바람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그리고 조건 없는 사랑이라, 그것은 영원을 바라는 인간본연의 어리석음 만큼 덧없다.


해인은 잠잘 준비를 마친 후 찬장을 열어 수면유도제라 쓰인 약통을 꺼내 유심히 들여다본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약을 먹는 것이 되려 꿈을 더 꾸게 하는 것 같아 제자리에 두고 돌아선다. 한때 그토록 나타나길 바랐던 그녀가 이제 다시는 그의 무의식에조차 발을 들일 수 없도록 그의 이 지독히 평온한 삶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는 그저 어떤 의식조차 없는 깊은 쉼만 원할 뿐이다.


“이제 그만…."


그는 꿈으로 찾아오는 그녀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며 집안을 유일하게 밝히던 거실등을 끈다. 마침내 찾아온 안식 같은 어둠 속에 이제는 진정 쉴 수 있기를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