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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Mar 25. 2024

가끔은 이런 행복, 김치국수와 수육

소박한 미식 축제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잔뜩 흐린 날씨다. 바람은 입고 있는 옷이 춤출 만큼 강하다. 3월이면 돌아오는 선생님과 상담을 마치고 아이와 동네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 평소 같으면 별일 없던 오후가 다른 때보다 바빠졌다.  

   

아이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무엇을 먹을지 얘기하다 국수로 정했다. 아침 운동길에 친구가 알려준 김장김치 송송 썰어 고명으로 올린 물 국수가 간절했다. 면 종류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아이는 기꺼이 좋다고 했다.     

집에 거의 다다를 무렵, 그래도 금요일인데 국수하나만 덩그러니 식탁에 올리는 게 아이에게 미안했다. 무엇인가 짜잔 하는 기쁨을 전해야 할 것 같다. 

“수육도 먹을래?”

“엄마, 그래도 괜찮아? 나야 좋지.”

집으로 가기 전 정육점에서 고기도 좀 샀다.  

   

벌써 다섯 시 반이 넘어간다. 아이는 보통 6시 반 전후로 저녁을 먹는다. 국수 생각에 다른 간식도 참는 눈치다. 손이 빨라졌다. 우선 수육 준비에 나섰다. 냄비에 적당량 물을 붓고 된장과 계피 조각, 올리브 잎을 넣고 고기를 담았다. 냉장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먹다 남은 콜라도 부었다.     


이제 45분 정도를 센 불에서 중간 불로 줄여가며 삶으면 된다. 국수 육수도 만들었다. 디포리와 양파, 양배추 잎 몇 조각을 넣고 끓이다 엄마의 집 간장으로 간했다. 그래도 뭔가 맛이 별로다. 언젠가부터 내 요리의 구원투수가 된 참치 액을 한 숟가락 더하니 맛이 확 달라진다. 깔끔함을 위해 청양고추 두 개도 함께 15분을 은근하게 끓였다.     

집안 가득 요리하는 냄새가 얽혀 들었다. 아이는 언제면 먹을 수 있냐고 난리다. 고기 한 조각을 꺼내 썰어보니 잘 익었다. 면에 온기를 더하기 위해 토렴을 서둘러 끝냈다. 채 썬 김장김치에 설탕과 참기름으로 양념해 둔 것을 두 숟가락 정도 올리고 김자반까지 동원했다. 

     

아이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후루룩 소리가 이어졌다.

“엄마, 이 국순 내 인생 국수야.”

“그래? 근데 엄마도 진짜 맛있다.”

국수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을까 할 만큼 기분 좋았다. 우리는 허기짐 때문인지 별말 없이 한동안 먹었다.  초고추장에 고기를 푹 찍어 먹은 아이는 한 번 더 거들었다.


“엄마, 고기가 살짝 짭짤하면서 달콤해서 참 맛있다.”

단맛이 나는 것을 놓은 게 없는데 그건 아마 콜라 덕분이었던 것 같다. 쨍하게 햇빛 나는 그런 달콤함이 아니라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국수와 고기와의 만남은 검증된 메뉴지만 오랜만에 경험하니 신세계다.


따끈한 국수 국물이 긴장했던 몸을 풀어 주었다. 온종일 오후에 있는 아이 선생님과 만남이 신경 쓰였다. 모르는 이 앞에서 말을 건네는 일에 어려움이 별로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달랐다. 정작 선생님과 얼굴을 마주한 건 십여분이었지만 집에 오니 기운이 없다. 


이럴 때 적당히 가는 국수 가락은 배를 채워주었고, 김치의 아삭한 맛으로 다시 깊이를 더했다. 국수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제부턴 종종 생각나는 음식이 될 것 같다. 특별히 재료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가벼워서 더없이 좋다.     


아이와 난 서로 말하지 않아도 행복했다. 아이는 한 그릇을 비우고 다시 한 그릇을 찾았다. 아이에게 새 학년 교실은 익숙해 가지만 아직도 어색한 듯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이와 마음처럼 잘 안되는지 저녁이면 그날의 어려움을 종알종알 얘기한다.     

 

그 시절을 겪었지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들이다. 어른이 된 지금에야 별일 아니다 여기지만 그때는 그것만큼 힘든 게 없다. 아이에게 경험을 들려주다 보면 그 시절 작아졌던 나를 만난다. 그 기분은 이상하고 묘하다. 그때는 감정의 정체를 잘 몰라서 힘들어했던 나를 이제야 안아준다.   

   

국수와 수육을 올린 저녁 한 상은 한주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우리들의 작은 축제였다. 이런 날은 음식이 주는 영향력에 절로 감동한다.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한 그릇을 만난다면 그게 무엇이든 다음을 기대할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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