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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pr 24. 2024

이유 있는 찹쌀떡

감정을 살펴보는 일

해보지 않았거나 미뤄두었던 번거로운 일을 꺼내는 날은 가슴속의 복잡함을 알리는 신호다. 며칠간 속상했던 마음이 이날 터졌다. 운동을 다녀와서 동생과 통화를 하다 펑펑 울었다.      


불편한 감정들을 얘기하면서 절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는 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 조금씩 선명해졌다. 타인의 행동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내가 못마땅하다 여기는 부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삼십여 분 동안 얘기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를 돌아보는 일은 시원하기도 하지만 에너지를 많이 쓰는 과정이다. 말하는 이도, 들어주고 이도 그렇다. 한참이나 멍한 채로 의자에 앉아있다가 일어났다. 그때부터 다시 하루를 잘 보내자는 의지가 샘솟았는지 오늘의 해야 할 일처럼 ‘찹쌀떡’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흐린 오후에 찹쌀떡을 만들었다. 송편과 시루떡은 가끔 만들었지만 찹쌀떡은 처음이었다. 둥근 얼굴에 흰 분을 바른 이걸 떡집에서 사 먹을 때마다 강한 단맛이 아쉬웠다. 떡을 다 먹고는 내가 하면 이러지 않을 텐데 하는 기대와 바람이 싹트다 사그라들었다.  


찾아보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찹쌀떡이 되는지 어렴풋이 그려졌다. 아주 어릴 적 제삿날이면 이것을 만들었다. 제사상에 올리진 않았지만 모처럼 찾아오는 친척들은 물론 이웃들과 나눠 먹기 위함이었다. 우선 큰 솥에 불을 때고 찹쌀가루를 쪘다. 그러고 나면  큰 스테인리스 양푼에 그것을 붓고는 하얀 가루를 묻혀가면서 둥근 모양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가운데 구멍을 내어 팥소를 담고는 깔끔하게 여몄다. 


찹쌀떡을 향한 시간은 복잡할 게 없었다. 냉동해 둔 찹쌀가루를 꺼내서 풀리고 찹쌀도넛에 넣었던 팥소가 남았다. 복잡한 재료준비가 다 되었으니 9분 능선은 넘은 셈이다. 채 친 가루에 설탕 한 숟가락과 소금을 아주 조금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보슬보슬한 상태로 두었다. 20분 정도를 쪄야 하기에 가루에는 약간의 물이 스며들면 되었다. 김이 오른 찜통에 면포를 깔고 가루를 붓고는 휴대전화 타이머를 맞췄다. 그러는 동안 찰기가 강한 찹쌀이 쉽게 떼어지도록 큰 도마에 옥수수 전분을 뿌려두었다.      


다 쪄진 찹쌀반죽을 붓고는 적당히 손으로 치대었다. 손에 워낙 잘 달라붙어서 숟가락으로 대충 휘젓고는 가로로 길게 모양을 잡고 7개 분량으로 떡을 잘라내었다. 이제 덩어리를 하나씩 들어 팥소를 넣으면 찹쌀떡 완성이다. 떡 하나를 들어 가위로 반쪽을 잘라 맛봤다. 달지 않은 순한 맛이 마음에 쏙 들었다. 모양은 별로인 못난이였지만 모르는 이에게 맛보라고 권할 만큼이다. 

음식을 만들 때마다 문득 ‘좋아한다’는 의미를 돌아볼 때가 있다. 갑자기 찹쌀떡을 하게 된 이 날도 그랬다. 그동안 힘들다 하면서도 발효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하는 빵을 굽고, 때로는 경험한 적 없는 낯선 요리에도 덤빈다. 아침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불쑥 떠오르니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평소 동작이 빠른 편이 아니지만 음식을 만드는 일은 속전속결이다. 이때 가끔 찾아오는 즐거움은 다른 것과는 달랐다.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게 맛으로 살아있다. 다른 이의 평가에 기대지 않고도 기쁨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간다.     

 

동생과 나눴던 이야기는 가족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불편함, 불만이 주제였다. 바로 내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니 얼마 동안 신경 쓰였다. 다른 이를 탓하지만 결국은 내게 머문 갈등이 타인의 이야기에 덧입혀져 커졌다.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찹쌀떡은 그런 나를 위한 놀이였다.   

  

“즐겁게 지내. 인생 뭐 없으니까. 너를 위해서 말이야.”

며칠 전 언니는 감감무소식이라며 연락을 해 왔다. 그러고는 통화하는 내내 후렴처럼 이 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기 위해 찹쌀떡을 떠올렸나 싶다.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일은 가보지 않은 곳을 가는 여행의 설렘과 비슷하다. 준비한 음식이 다되어 맛을 확인하는 잠깐은 실망할 때도 있지만 바람이 통했다는 사실에 흐뭇하다. 

   

찹쌀떡을 만들던 날은 그냥 해 보는 즉흥곡같이 움직였다. 며칠이 지난 후 돌아보니 그때는 몰랐던  의미 있는 날이었다. 나를 향한 위로가 찹쌀떡이었다. 불안한 상황에서 움직임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빠른 회복력을 갖는다. 울퉁불퉁 찌그러진 찹쌀떡은  손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훨씬 자유롭게 모양이 변한다. 변화무쌍하게 떠다니는 구름 같은 내 마음도 찹쌀떡처럼 조물조물 어루만져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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