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살아가는 일
봄이 왔고 이제는 여름 기운도 느껴진다. 지난겨울은 길었고 아직도 그 속에서 헤어 나오려 애쓰는 중이다. 무엇 때문인지 선명하진 않지만, 의욕이 별로 없었다. 습관화된 무기력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외면하고 싶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을 단정 짓는 자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론 그런 것에서 나를 보호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을 쌓아둔 건 아니지만 그리 활력이 없었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럴 때면 당연히 먹는 일이 잦았다.
“내일부턴 먹는 걸 줄여야지.”
저녁이면 이런 다짐을 하지만 다음날이면 먼 우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혹은 혼자 부지런히 무엇을 찾았다.
그건 아마 내 가슴속에 허한 것을 순간 잊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더불어 먹는 걸 좋아하는 태생적인 성향도 한몫했다. 과자와 빵과 귤을 그리고 때로는 맛난 거까지 쉼 없이 먹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봄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몸무게다.
이때 또 한 번의 좌절과 유사한 듯 보이는 별로인 기분이 찾아온다. 따뜻해지니 우선 몸이 무겁다. 옷을 입을 때 끼는 현실과 내가 봐도 너무 살이 오른 얼굴도 그리 반갑지 않다. 그렇다고 빨리 변화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3월부터 달라져야겠다고 나를 재촉하면서도 시간이 꽤 걸렸다. 어떤 일을 할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건, 보이지 않는 갈등의 순간을 지나야 서서히 진척된다는 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등 여러 날을 보내야 한다.
불과 며칠 전부터 미세하게 달라지는 중이다. 먹는 일에서 맛있게 먹지만 필요 이상의 것을 찾지 않으려 한다. 입에 무언가를 가져가고 가고 싶은 순간에 한 번 생각한다. 그러는 동안 여유가 생겨 멈춘다.
이성이 확실하게 작용하기 어려운 때는 맛난 음식 앞에서 무관심한 태도다. 그럼에도 정신을 자제하려 하니 몸이 조금은 편안하다. 이런 날은 식탁도 달라진다. 적당히를 강조하면서 평소보다 양을 줄이고, 채소를 즐겨 찾았다.
‘가볍다’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간단하다, 간편하다, 상쾌하다, 산뜻하다 등 비슷한 말들 역시 내가 그리는 일상의 모습과 닮았다. 어느 심리학자의 책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들어온 낱말이다. 너무 큰마음을 먹지 않으면 지금 바로 가볍게 살 수 있는 듯하다. 매일이 충분히 좋은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마음을 따라주는 게 샐러드다.
그동안 샐러드는 간단하다 여기면서도 집에 별것이 있을 때 가능하다 여겼다. 요즘 들어 챙겨 먹는 샐러드는 먹고 싶은 것, 집에 있는 것을 모아 넣고 버무리는 형태다. 점심을 샐러드로 정했다.
엄마가 보내준 상추와 돌나물을 씻었다. 집에 묵혀 둔 배를 적당한 크기로 썰고 당근과 양파는 채 썰어 기름에 살짝 볶았다. 장을 보다 샐러드에 넣기 위해 사 온 맛살 크래미도 함께다. 이 모든 것을 그릇에 담았다. 소스는 유자 올리브. 늦겨울에 담근 유자청을 블렌더로 갈고 올리브유와 식초를 섞었다.
어떤 맛일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다. 그저 내가 만든 것이니 괜찮다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다. 맛을 보니 생각보다 훌륭하다. 풋풋한 풀향이 별로인 돌나물과도 합이 좋다. 유자청의 진한 향 앞에서 돌나물의 기세가 약해졌는지 아니면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배는 아삭하다. 당근과 양파도 낯설지만 나름 어울린다.
볼에 가득했던 샐러드를 혼자 다 먹었다. 먹고 나니 가볍게 여겼던 샐러드가 무거운 다른 것으로 다가왔다. 다시 자동으로 체중계 위에 선다. 사각 까만 유리판 위에 선명히 찍힌 숫자를 화인하고 나니 지금의 행동이 부끄러움과 유난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부정적이고 복잡한 생각이 찾아올 때 이때를 넘길 대체제로 먹는 일이 앞선 지난 계절이었다. 무엇이 나를 가뿐하게 해주는 것일까? 나름 찾아낸 답은 현재를 살아가기였다. 대부분의 불안과 걱정은 지났거나 오지 않은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매번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한다. 단어의 나열보다 몸으로 알아차리기는 끊임없는 실천의 영역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피하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 이런 시간이 늘어날수록 정신없이 먹는 일이 힘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샐러드가 내게 여러 얘기를 들여주는 점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