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내는 밥상
덥고 또 더운 날이다. 아침부터, 그 이전 새벽에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잠깐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작년에는 어땠을까? 매년 이맘때면 떠올리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이란 저장소를 믿고 있지만, 대부분은 망각이 겹겹이 쌓여있을 때가 많다.
그렇게 한참을 돌이키려 했다. 그렇지만 결론은 모르겠다였다. 이렇게 해마다 반복되는 더위 앞에서 작아졌다가, 다시 맞이하기를 반복한다. 며칠 전 하늘을 보고 문득 가을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막내가 지나다 들었는지 아직은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라며 가을은 터무니없다고 했다.
에어컨 바람 가득한 시원한 거실 소파에 앉아서 멀리 있는 높은 파란 하늘을 보면 분명 그런 느낌이었다. 그건 아직 아주 작은 소리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느린 속도로 오고 있는 다음 계절에 대한 바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한낮에 도로를 걷는 일이 힘들다 할 정도의 날씨지만 일상은 흐른다. 이럴 땐 불볕더위 속에서 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대단하다 싶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서 당연하지만 견디고 있는 여러 삶들이 다가왔다.
일상을 보내는 일도 그중 하나다. 남편은 매일 회사에 나가고 난 반복적으로 밥을 차린다. 아이들이 방학했으니 전보다 부엌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촘촘해졌다. 아침을 먹고 돌아서면 점심이고 다시 저녁이다.
그건 내가 보내야 하는 당연한 하루의 리듬이지만 요즘은 절로 힘들다는 소리가 나온다. 더운 날 밥을 준비하는 일은 그동안 반복한 것이지만 복잡하다. 이건 결국 불편함과 어려움을 동반한다는 얘기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 집밥을 고집하는 내게는 더욱 그렇다.
에어컨을 켜놓고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문이 꼭꼭 닫힌 집에 있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종종 있다. 거기에 여러 양념이 더해지는 음식을 만드는 건 정말 피하고 싶다. 그래서 밥 하는 시간은 에어컨을 끈다. 아무리 더워도 가족들에게 참으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나도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 며칠간은 대충 먹었기에 힘을 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스스로 가한다. 더불어 잘 먹어야 성난 황소 달려들 듯하는 날씨를 보낼 수 있다는 주부의 생각이 강해진다.
오랜만에 닭다리살 조림을 했다. 닭가슴살과는 달리 쫄깃하고 감칠 맛있는 부위를 선택해서 매콤하게 만들었다. 고기 4조각을 깨끗이 씻고는 앞뒤로 칼집을 내었다. 그래야 양념이 고루 들어갈 뿐만 아니라 잘 익는다. 날씨의 기세 때문인지 한입 먹었을 때 강한 인상을 주어야 속이 후련해질 것만 같다.
아무것도 두르지 않는 뜨거운 팬에 고기를 올리고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이 과정에서 식초 한 숟가락을 가득 붓는다. 그래야 고기가 쫀득해지는 것은 물론 잡내가 사라진다. 최근에 텔레비전에서 알게 된 요리 팁이다.
고기가 익어갈 무렵 양념을 준비했다. 간장과 굴소스, 마늘 다진 것, 청양고추와 설탕, 후춧가루, 물을 넣고 잘 섞었다. 잘 익은 고기에 이것을 놓고 중간 불로 끓이면서 익혀주면 된다. 이때 포인트는 청양고추다. 고추를 다져서 넣으면 고기의 불편한 향이 사라지는 동시에 적당한 매운맛이 은은하면서도 특색 있는 맛으로 조화를 이룬다.
한 그릇의 저녁 찬이 만들어졌다. 다른 채소들과 식탁을 꾸몄다. 오랜만에 고기가 올라오니 망설이는 이 없이 모두 잘 먹었다. 하루가 잘 마무리되었다. 무엇인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매일 하는 일을 다른 이들이 만족할 만큼 신경 쓰고 그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다. 오랜만에 혼자 흐뭇했다.
어제와 다른 찬으로 밥상에 올리고 그 덕에 온 식구가 얼굴을 마주 보며 잠깐 행복했다. 당연하다 여기며 지나치는 것들을 다시 바라볼 때가 있다. 내 일을 묵묵히 하는 소중한 움직인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하루인 듯하다.
당연하다면서도 당연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 여름을 잘 보내기 위해서 얼마 동안 밥상 나름의 전략을 짜야겠다. 한 그릇의 음식에 무한 에너지를 담고 싶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