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진미 Nov 04. 2024

팥빵 굽던 날

천천히 견디기

기대면 편안하다. 그 무엇이든 잠시 힘든 것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10시를 훌쩍 지나갈 무렵에 밀가루를 꺼냈다. 어떤 빵을 만들어야겠다는 확실한 목적은 없다. 반죽이 발효되는 시간 동안 정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시작했다. 누가 빵이 먹고 싶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좋아서다. 기분이 별로여서 다른 것에 몰두하고 싶다는 증거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 먹자고 할까 하는 고민도 했다. 아니면 동네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 쓰는 일도 선택의 범주에 두었다.     


이 두 가지를 저울질하다가 결국은 집에 머물기로 했다. 봄비 같은 가을비가 내린다. 태풍의 영향 때문이라고는 하는데 바람이 없으니 별 느낌이 없다. 바닥이 젖었고, 우산이 필요하다는 것과 습도가 조금 높을 뿐이다.


밖에 나가려면 옷을 갈아입고 몇 가지 챙겨야 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지금 있는 그대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빵이었다. 밀가루와 작은 저울을 꺼냈다. 매일 사용하는 프랜차이즈 종이컵에 적당량의 밀가루를 넣으니 예상했던 대로 240g이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울에 올려놓으니 대략 맞는다. 그간의 경험이 알려주는 익숙한 답이다. 여기에 우유도 140g을 데우고 설탕과 드라이 이스트 소금을 넣고 휘휘 저었다. 밀가루에 그것을 넣고 잘 섞은 다음 손으로 열심히 치대었다,   

   

아무 마음이 없다. 단지 밀가루가 서로 적절한 끈기를 가지며 어울리도록 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우유가 부족했는지 뻑뻑한 느낌에 대충 미지근한 물을 조금 더했다. 이제부터 다시 반죽 안에 물이 잘 스며들도록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제법 매끈한 반죽이 되었다. 다시 식물성 기름을 더했다. 이제부터가 강한 손 힘이 필요하다. 기름과 반죽이 어울리도록 만져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처럼 스며들지 않는다.  치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죽은 부드러워지고 기름의 흔적은 서서히 사라진다.     


기름은 사라진 것 같지만 둥근 반죽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그렇게 열심히 반죽 일을 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머문다. 불과 삼십 분 전에 방향을 틀어 집을 나섰다면 열심을 무언가를 얘기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빵은 그저 소리 없이 내 감정을 받아주었다. 며칠 전 만들어둔 팥소가 있었다. 발표시킨 반죽을 6조각으로 만들어 밀대로 길게 밀어준 다음 팥을 올리고 돌돌 말아주었다. 팥롤빵이다. 이것을 식빵 굽는 틀에 적당한 간격으로 두었고 다시 한 시간을 발효시켰다. 그러고 나서 180도 온도에 35분을 구웠다. 세 시간 정도 난 그럭저럭 잘 지냈다.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팥 맛은 심심한 듯하면서 끝으로 갈수록 살짝 단맛이 난다. 부족한 듯 하지만 충분한 소박 함이었다. 강렬한 단맛이 없는 대신 곳곳에 팥 알갱이가 살아있는 거친 느낌은 어릴 적 먹던 찐빵을 떠올리게 한다.  

 

몇 살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어린 날이었다. 엄마는 제삿날이면 가끔 찐빵을 만들었다. 제물로 올리지는 않았고 이날 모인 가까운 동네 친척들과 나누기 위한 일이었다. 자정을 넘기고 제사는 절을 하고 둘러앉아 여러 음식들과 나눠 먹는 음복 과정을 거치면 끝났다. 


그리고 친척 어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손에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차롱이라 불리던 바구니에 찐빵과 떡, 음식들이 조금 담겼다. 몇 시간이 흐르면 과수원에서 일하다 출출할 때나 학교 다녀온 아이들의 큰 먹거리가 되었다. 그 빵에는 어김없이 팥소가 들어갔다. 


내 빵은 그것에 비하면 조금 세련되었나? 팥을 불려 삶고 소를 만들던 날부터 마음이 작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후로 사흘쯤 지나서 빵을 구웠다. 오븐에 들어가기 전까지 과정을 모두 끝내면 여유를 맛본다. 부지런히 무엇을 하고 나서는 오롯이 내 시간이 된 듯한 기분은 내게 다가오는 깊은 만족이었다. 


빵 굽는 일은 돌아보면 과정을 하나씩 해 가며 완성에 이르는 일이다. 몰아치는 생각에선 마법처럼 뚝딱 문제 해결을 원하지만, 해법은 정반대다. 혼란스러운 때를 견디어 지내며 차분히 바라보기다. 그다음은 천천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가는 것. 빵을 구울 때마다 단숨에 되는 일은 없다는 는 걸 배운다. 빵 굽는 시간이 얼마나 더 쌓여야  일상으로 이것을 끌어올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