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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11. 2024

넉넉해지고 싶은 날 호박죽

계절, 일상 

늙은 호박과 친해지는 중이다. 엄마가 보내준 것 하나와 위층 사는 언니가 준 것까지 더해 늙은 호박 두 개가 있다. 호박은 김치 냉장고 옆에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다. 호박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장에 다녀오는 시골 할머니의 넉넉함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풍경들이 그립다. 그러고 보면 본다는 건 의식하지 않는 사이 기억되어 어느 순간에는 꺼내어 다시 바라보는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잡지에서 봤는지 아니며 우연히 들른 여행길에서 만난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시골 버스 정류장에는 바구니에 무언가 가득 담고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이 있다. 외할머니 생전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언제 차가워질지 모를 가을날을 붙잡으려는 듯 편안한 의자나 공터에 자리를 잡고 있다.   

  

찡그린 얼굴보다 세상 누구보다 여유로운 모습이다. 오랜만에 장을 봤고, 이날 산 것을 가지고 집으로 가 음식을 만들어 먹을 생각에서 오는 설렘과 행복일까? 

며칠 전부터 호박을 밥상에 올렸다. 그냥 호박이 아닌 늙은 호박이다. 호박과 늙은 호박은 분명히 다르다. 전해오는 기품에서부터 그러하고 오랫동안 밖에 두어도 얼마간은 상하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부터 깊어가는 가을까지 세상의 풍파를 견뎌낸 힘은 무엇과도 비교 불가다.     


크기만 해도 상당하다. 호박을 들기 위해선 당연히 양손을 사용해야 한다. 한쪽을 잘라서 요리하기 시작하면 호박을 잘 먹겠다는 일종의 다짐이 필요하다. 호박을 먹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지만, 양이 상당해서 적당한 간격으로 요리를 해야 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며칠은 싱싱한 것 같아도 시간이 갈수록 예쁜 색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썩어서 버려야 한다.      


이때 냉장고를 당연히 떠올린다. 씨와 껍질을 벗겨 손질한 다음 냉동실에 보관하면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갑고 단단해진 그건 늙은 호박이 아닌 것 같다. 늦가을의 공기를 감싸 안은 그런 느낌은 사라지고 없다. 호박을 썰 때 끈적한 풀기와 천천히 다가오는 호박 냄새를 맡기 어렵다.  단지 어느 요리에 들어가는 채소일 뿐이다.   

가능한 냉동실보다는 실온에 놔두고 잘 먹는 방법을 고민한다. 처음에는 엄마의 요리법을  따라 했다. 손질한 호박을 듬성듬성 썰고 적당한 물을 냄비에 부은 다음 보글보글 끓이다 조선간장과 참기름, 깨를 뿌려주는 호박 나물이다.  

    

맑은 노랑과 주황의 어디쯤 있는 호박색과 더불어 달큼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설탕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지만, 호박 속에 숨겨져 있던 단맛은 세상의 기운을 오랫동안 받아낸 자연의 맛이다.     


호박을 살피다 보니 호박죽이 먹고 싶어졌다. 늙은 호박을 푹 끓여 블렌더로 갈고 냉동했던 찹쌀가루를 해동해서 조금 넣고는 나무 주걱으로 한동안 저었다. 마지막으로 소금을 조금 더하면 끝이다.   


후루룩 마셔도 될 만큼 죽이 부드럽다. 아침부터 생각하다 늦은 오후에 후다닥 냄비 가득 만들었다. 호박죽을 천천히 먹고 싶었다. 뜨거운 그것을 호호 불며 먹다 보면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천천히 스며든다. 그때의 편안함과 포근함은 지친 나를 위한 나만의 위로법이다.

   

늙은 호박도 초록으로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호박넝쿨은 얼마나 기운이 센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멀리멀리 뻗어 나간다. 막 호박이 달려 크기 시작하던 여름 무렵에는 늙은 호박이 보이지 않는다. 호박을 찾는 이들도 적당한 크기의 앙증맞은 애호박을 원할 뿐이다.     


가을이 깊어질 무렵, 호박잎이 다 시들어가고 가을걷이도 마무리될 쯤에는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늙은 호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겉은 은은한 곶감의 분을 바른 듯하다. 호박껍질은 흡사 밭에서 평생 농사지은 농부의 손처럼 거칠면서도 한번 만져보고 싶을 만큼 정겹다.  

   

껍질에 가려있던 속살에는 가을이 가득 담겼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주황과 노랑, 껍질 안쪽에 물든 연두는 단풍잎과 은행잎, 시골길을 지나다 마주하게 되는 이름 모를 나무의 가을 색이다. 지금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조급해하지 말자고 나를 다독인다.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늙은 호박처럼 넉넉함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호박죽을 먹으며 가을이 나와 가장 가까운 어디쯤에 있는 듯하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것만 담아도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계절이다. 그것을 오롯이 잘 즐기는 방법은 이때 나는 채소와 과일 등을 식탁으로 가져오는 일도 그중 하나다. 제철 먹거리는 애쓰지 않아도 본래 지닌 것만으로도 충분히 끌리는 맛을 담고 있다. 먹고 싶을 때 조금만 움직이고 나면 그 후에는 입안이 즐겁다. 소소한 일상이 작은 정성으로 생기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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