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에게 겨울 맛
어제 늦은 저녁부터 함박눈이 쏟아졌다. 아침을 먹고 동네 뒷산에 올랐다. 햇살의 따스한 기운에 밤새 쌓인 눈이 비 내리듯 녹기 시작한다. 산에서 내려와 점심을 챙기다 보니 하루가 지난다. 집에 모두가 모이면 적당한 간격을 두고 간식을 찾는다. 막내가 밀크티를 먹고 싶다 했다.
겨울날 밀크티는 이름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한다. 끓는 물만 준비하면 되는 다른 차와는 달리 이건 기다림이 필요하다. 빨리 먹을 수 있는 가루 형도 있지만, 집에는 그것이 없다. 언젠가 사두고 모셔둔 얼그레이를 꺼냈다. 우유를 냄비에 담고 찻잎을 넉넉하게 넣는다.
이제부터는 다른 것을 충분히 하고 있으면 된다. 대신 불은 은은하게 해야 제맛이 나온다. 찻잎이 충분히 우러나기를 바라는 동안 집 안은 은은한 차향이 감돈다. 밖이 추울수록 온기가 더해진다.
한참을 보내고 나서 찻잎을 걸러냈다. 밀크티가 한 잔씩 돌아갔다. 각자 자기만의 공간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일요일 오후를 보냈다. 적당한 단맛을 위해 꿀을 조금 더했다. 가끔 카페에서 마시는 밀크티가 너무 달아서 고개를 저었던 적이 있다.
차 맛은 사라지고, 설탕 맛만 가득한 것이 싫었다. 무엇에라도 기대고 싶을 땐 달콤한 기운에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만 그건 잠시다. 밀크티는 가족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모르겠다. 다들 맛있다는 한마디로 정리했지만 난 매일 그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는다.
말하지 않으니 그들이 내 마음을 잘 모르는 건 당연하다. 따뜻한 차 한잔이 조금이라도 하루를 보내는 중에 기분 좋은 순간이 되기를 바랐다. 이걸 마시며 한번 미소 지을 수 있었으면 했다. 내가 해주고 싶을 때 내가 가능한 것들을 내놓을 뿐이다. 이런 나를 알아달라고 할 때도 있었지만 이젠 그냥 해주었다는 거로 만족이다.
다음날은 나를 위한 음료를 만들었다. 아이가 카페를 갈 때마다 시키는 게 고구마라테다. 어느 날은 커피를 마시다 달콤한 것이 먹고 싶어 아이 것을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움에 커피가 싫어질 정도였다.
고구마 피자를 만들다 남은 으깬 고구마가 남아있었다. 냉장고에 하룻밤 두었는데 운동을 다녀오니 이것이 급히 먹고 싶었다. 그대로가 아닌 따뜻한 우유를 잔뜩 품은 것으로 말이다. 매일 사용하는 작은 냄비에 우유를 붓고는 따뜻하게 데워질 무렵 고구마를 넣고 블렌더를 돌렸다.
순간 서로가 따로 놓던 그들이 한 몸이 되었다. 어느 게 우유고 고구마인지 구분할 수 없다. 컵에 가득 담고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듯 없는 듯한 단맛에 자꾸 먹게 된다.
주말 동안 집안일에 허덕이며 피곤했던 나를 이 음료 한잔으로 다독였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을 기대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나를 대접했다. 어렵지 않아서, 편하게 언제나 할 수 있어서 난 일종의 뒷배를 만난 기분이다.
컵 가득 고구마라테를 담아서 천천히 마셨다. 적당한 온기가 어제부터 쌓인 여러 감정을 천천히 옅어지게 했다. 우선 속이 데워지면서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온다. 추운 날은 바깥 기운이 감정의 변화에 한몫한다.
다른 무엇에 기대어 나를 숨 쉬게 하지 않으려 한다. 오롯이 내가 헤쳐나가야 하는 일이라면 그러해야 하는 법이다. 순간 사라지는 말들의 위로가 내 어깨에 놓여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일 뿐이다.
결국은 혼자다. 그때마다 나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정말 다행이다 싶다. 고구마라테는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될 듯하다. 어떤 날은 고구마를 삶거나 굽는 일마저 힘들 수도 있지만, 이날의 기억이 각인되어 머뭇거리다가도 힘낼 수 있을 것이다.
집에는 고구마가 아직도 충분히 있다. 엄마가 가을날 보낸 준 것이 상자 안에서 쉬고 있다. 아마도 내일이면 이것이 또 생각날 것 같다. 고구마 본래의 부드러움과 적당한 달콤함은 이 계절에 숨 쉬며 빛난다. 고구마는 우유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단짝이다. 과거의 좋았던 어느 날을 떠올리고, 지금 다가오는 무게를 벗어나고 싶을 때는 이것을 마시며, 한숨 크게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