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태도
밤을 먹고 싶으면 밤을 보내야 했다. 아무리 빨리하려 해도 불가능한 것. 밤으로 무엇을 만들어 먹는 일이다. 밤 속살은 딱딱한 갑옷을 입은 듯 껍질에 둘러싸여 있다. 밤은 발음하는 일도 좀 길게 해야 한다고 하니 이래저래 서두르면 안 될 것 같다.
남편이 얼마 전 회사 동료가 밤을 주었다며 가져왔다. 밤이 담긴 작은 상자를 보면서 반가움보다는 어색함이 흘렀다. 밤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다. 가을이면 이것을 한 번은 먹을까 하다가도 금세 사그라진다. 그래서 내 돈을 주고 밤을 사본적은 없다.
가을이면 집에 가끔 밤이 생겼다. 아는 이가 맛보라며 갖다 준 것들이었다. 이번처럼 꽤 양이 되는 건 처음이다. 바로 먹어야겠다는 뜻이 들어서기 어렵다. 최소한으로 한다면 밤을 찌는 것이지만 그것 또한 시간이 필요하다. 밤을 먹는 일과 이것으로 요리하는 일 모두에 여유가 필요하다.
밤은 찌거나 구우면 금방 말랑해지는 고구마와는 다르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맛 밤은 껍질을 다 벗긴 상태로 구워져 나오기에 먹는 일이 간단하지만, 집에서는 아니다. 손쉽게 할 수 있는 찐 밤조차도 밤을 반으로 가른 다음 속살만 먹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이래저래 밤은 틈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밤을 잘 먹어야겠다. 일이 귀찮아서 냉동실로 바로 보내버리기엔 아깝다. 한눈에 옹골찬 기운이 흐르고, 찜통에서 바로 나온 찐빵처럼 통통한 것이 귀엽다.
밤을 향한 마음과 달리 행동은 더뎠다. 나흘 정도가 지난 다음에야 찐 밤을 먹었다. 다시 며칠을 보내고 주말이었다. 이번에는 좀 더 밤을 귀하게 대접하기로 했다. 몇 년 전에 만들었던 보늬밤조림을 만들었다. 밤 속살을 감싸는 속껍질(보늬)을 그대로 둔 채 조리는 음식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추운 겨울 주인공이 사부작사부작하며 단숨에 만든 그것이 궁금했다. 이것을 처음 도전했을 때는 대충의 방법만 익힌 채로 마음이 급했다. 빨리해서 어떤 맛인지 알고 싶었다. 시간을 보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센 불로 속도를 내니 밤 속살이 으스러졌다. 의욕만 앞서는 날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냉장고를 살피다 살짝 얼어있는 밤을 보고는 지나치기 어려웠다. 우선 뜨거운 물에 밤을 담갔다. 그래야 껍질을 벗기기 쉽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서너 시간을 보내고 저녁 즈음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껍질을 깠다. 밤은 단단했지만 물이 어느 정도 스며들었는지 칼이 잘 들었다. 하나둘 밤이 그릇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남짓 지나니 그릇에 갈색 껍질이 수북하다.
밤 조림을 위한 출발점이자 가장 번거로운 일이 끝났다. 밤은 아침까지 물에 담가서 떫은맛을 빼야 한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30분 동안 중간 불로 충분히 삶고 물로 헹궈내기를 세 번 했다. 그러는 사이 보늬에 붙어있던 털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다시 한 알씩 들어서 꼼꼼히 손질하고는 설탕과 물을 넣고 졸였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 간장 한 숟가락과 와인을 서너 숟가락 넣었다. 이것이 밤의 풍미를 좋게 한다.
한 시간 반 정도 약한 불에서 조렸다. 은은한 밤 냄새가 퍼졌다. 완성된 밤조림은 겉은 적당히 단단했고, 속은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조림밤을 맛보면서 태도를 생각했다. 전과는 달라진 서두르지 않는 나를 보면서 편안해졌다. 동시에 잘해야지라는 욕심 같은 것도 없다. 별생각 없이 되는대로 먹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머문다.
음식을 하다 보면 혼자서 무슨 경주를 하는 기분이다. 빨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음에도 바람 날려 보내듯 정신없다. 이럴 경우 제맛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바로 간단히 먹을 요량이면 무리가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어야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맛을 유지하기 위해선 꼼꼼해 챙겨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이 설령 별것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큰 차이를 만든다. 음식 맛은 만드는 이의 태도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 같다.
집안에서 멀리 보이는 바깥 풍경을 보며 얼마나 추운지를 가늠해 볼 뿐인 겨울날 꺼내먹을 밤 조림을 떠올린다. 밤조림 병에 가득한 진한 갈색은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가을 숲을 닮았다.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이면 밤 알 하나를 꺼내며 지난가을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을 아끼고 아껴서 봄 무렵까지 가져갈 수 있다면 설레면서도 두려운 시작을 응원해 줄 것이다. 오래 두고 위로해 줄 음식이니 느린 걸음이 어울린다. 보늬밤조림처럼 손이 많이 가는 건 그만큼 내 곁에 오래 머무는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