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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고구마 전

겨울 밥상 준비

by 오진미

가을이 깊어지다 겨울이 되었다. 겨울이 낯설다면서도 행동은 계절을 따라간다. 우리 집 식탁이 변했다. 바로 해 먹는 음식에서 시간을 들이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것처럼 하는 된장국도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시래기가 주인공인 국이 일주일에 두 번은 오른다. 다발 무가 마트에 나오기 시작하는 가을날 한가운데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무가 튼실해질 만큼 힘을 쓴 잎과 줄기는 억세고 강해서 그리 반갑지는 않다. 이맘때 진한 초록 잎을 보면 그대로 두기가 아까워 손질하고 국이나 찜, 나물에 활용한다.


"음식 만드는 일은 부지런해야 해." 엄마가 음식을 준비하며 습관처럼 내뱉었던 말이 떠오른다. 그대로 두어서 되는 건 없다. 손이 필요하다. 무 줄기를 다듬고 씻은 다음 팔팔 끓는 물에 삶는다. 적당히 데치는 것으로는 억세고 불편한 맛이다. 부드러움을 찾기 힘드니 줄기보다는 잎을 좋아한다. 정말 필요한 영양소는 줄기에 있다고 한다.


원하는 부드러움을 위해 시간을 둔다. 그러면 보기만 해도 튼튼한 줄기는 서서히 물러진다. 입안에서 배척되지 않는 식감이 나온다. 고소한 된장 국물이 건더기에 절로 물들었다. 매일 찬거리를 고민하지만 정작 그리 열심히 새로운 것을 만들지도 않는다. 밥때가 되면 즉시 떠오르는 것들이 그날의 찬이 된다.

고구마 전

집에는 고구마가 한 상자 넉넉히 있다. 엄마가 과수원 한편에 농사지은 것이다. 땅의 특성 때문인지 엄마의 고구마는 밤이나 호박고구마와는 다르다. 굽거나 찌는 순간 속살은 연한 회색으로 변한다. 보통 고구마가 보이는 주황이나 노란빛과는 다르다.


밥상에 이것을 올리기 위해 가끔 전을 만든다. 고구마 껍질을 벗기고 채를 썬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남은 자투리 무와 당근을 넣어서 색을 풍부하게 했다. 몇 해 전부터 알았지만 무는 다른 채소들과 잘 어울린다.


겨울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무를 익히면 물러질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물을 넣지 않고 지져내면 오히려 아삭하다. 청양고추는 이런 상황에서 익숙한 것들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반긴다.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최고의 향신료다.


외국의 여러 향신료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때마다 감탄하고 지난다. 그것들이 들어간 이국의 음식을 쉽게 먹어본 일이 없으니 어떤 느낌인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설명해 줄 때 따라붙는 단어를 통해서만 짐작할 뿐이다.


이에 반해 청양고추는 언제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음식 맛을 깔끔하게 해주는 데 일등공신이다. 육류를 조리할 때 따라붙는 이상한 냄새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국물 요리에도 깔끔한 맛으로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음식이 청양고추를 만나면 제 색깔을 입는다. 이번에도 고추 하나를 다져서 넣었다. 기름이 들어가는 전에서 풍기는 느끼함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전은 고추 덕분에 뿌리 작물에서 다가오는 텁텁함을 날리고 생기가 찾아온다. 늦게 오는 남편의 저녁상에 우거지 된장국과 김치, 멸치볶음에 더불어 밥상의 주인공으로 전을 올렸다.

은은한 불에서 천천히 부쳐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밥 하는 때가 소란스럽지 않다. 다른 일을 하다가 잠깐 팬 앞에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면 된다. 한쪽 면이 확실히 익었다 여기면 뒤집어서 다른 쪽을 지진다. 전 세 장을 완성하는데 20여 분이 걸렸다.


단숨에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없으니 적당히 될 만큼 익었다. 전을 맛있게 하는 건 가만히 두기다. 음식을 만들 땐 정성스럽게 손질하거나 양념을 잘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별것을 하지 않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일 때도 있다.


재료가 서로에게 스며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매일 해야 하는 일에 신경을 덜 쓰고 싶다면서도 그대로 두는 일은 어렵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앞세워 동분서주하다 문제해결에서 멀어지는 때와 비슷하다. 고구마 전은 재료를 버무리는 데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될 때까지 먼발치서 바라보기가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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