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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석 Nov 12. 2022

미제 깡통 코코아



2022년 11월  첫날밤, 일곱 살 엘리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4년 전 뇌종양 수술을 받고 어린이 병원에서 재활을 하던 때였다. 당시 엘리 엄마도 항암 치료를 받고 있어서 할머니인 린이 손녀를 데리고 어린이 병원을 찾을 때가 많았다. 힘든 항암치료를 모두 마치고 잘 지내던 아이가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고 호흡이 힘들어져 어린이 병원에 왔다가 패혈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엘리를 마지막으로 본 그날은 의료진들이 세인트루이스 어린이 병원으로 그녀를 긴급히 이송하기 위해 헬기용 침대로 옮기는 중이었다. 인공호흡에 의지해 체온과 맥박을 간신히 유지하던 아이는 그날 오후 이송 뒤 이렇다 할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미 가족들을 떠나보내면서 내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온 터였다. 소식을 들은 뒤 기도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가슴 한 구석 아련한 슬픔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를 치료해 온 의료진, 특히, 그녀가 일주일 두세 번씩 들렀던 어린이 재활치료센터 치료사들도 함께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돌보던 아이들의 죽음을 처음 겪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수년간 알고 지내던 아이가 숨지면 느낌이 다르다. 내 아이도 아니고 내 친척도 아니지만, 같이 함께 한 시간과 기억들 때문에 더 깊은 슬픔에 마음을 가누지 못한다. 이건 많이 경험한다고 해서 무뎌지는 그런 종류의 경험이 아닌 것 같다. 병원 채플린 레지던트 때 처음 만난 한국인 여성 한 분이 1년간 암투병을 하고 돌아 가신 뒤에 느꼈던 슬픔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우울감이다. 거기에다 이번 주 연일 참석한 장기기증환자 환송 도열식, Honor walk 도 슬픔에 슬픔을 더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 살았던 아파트 근처 이태원에서 말도 안 되는 참사 소식의 전모가 전해지면서 내 마음을 정말 슬픔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다행히 인척 가운데 희생을 당한 사람은 없었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우울해지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내 마음을 다잡을까? 코로나 이후로 분명히 내가 가진 회복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쉽게 마음이 잡히지 않고 환자를 만나고 위로하는 일이 힘겹기만 하다. 자기 돌봄과 마음 모으기 훈련을 다시 돌려 보고, 동료들과 나누고 상담을 받아보기도 하지만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돌봄’과 ‘마음 모으기 훈련’ 효과가 나타날 것을 믿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오늘 하루 이 우울감을 가족들에게 전하지 않기 위해 또 에너지를 써야 하는 데 그게 쉽지 않다. 그런 생각에 사무실에서 서성거리다가 우연히 커피메이커 곁 거치대에서 코코아를 발견해 한 잔 내렸다. 그리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따뜻하고 달달한 코코아 맛이 내 뇌로 전해져 행복감이 밀려왔다. 특히, 어린 시절 엄마가 타 주시던 ‘미제 깡통 코코아’ 그 맛이 생각이 났다. 정말로 강한 상기 작용이 내 눈앞에 벌어졌다. 가상현실 기계를 쓴 것 같은 느낌. 어떤 소설에서는 마들렌 맛보다가 이런 느낌을 느꼈다고 하는데 나는 미제 코코아다.

 

초등학교 때 엄마는 나에게 이 미제 코코아를 머리 좋아지는 약이라고 소개했다. 약치고는 정말 달고 맛이 있어서 매일 먹어도 되냐고 했더니, 엄마는 하루에 한잔씩만 먹어야 된다고 했다. 추측컨대 가격이 만만치 안아서였을 것 같았다. 당시 80년대 초 미제 코코아 가격을 알 수 없지만 그리 넉넉지 않았던 가정형편을 생각하면 그랬던 것 같다. 난 그 코코아를 마시는 시간을 잊을 수없다. 따뜻하고 달콤하고 거기다 엄마 말대로 똑똑해지는 느낌까지… 코코아 한 잔을 마시면 공부도 더 잘되고 내가 뭐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현재 아이들이 스타벅스 커피나 비싼 프라푸치노를 먹으면서 이런 느낌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방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서울우유를 서울 친척집 가서 처음 먹어본 느낌이랄까… 뭐 그렇다… 


그런데, 반백이 다 되어 달달한 코코아 한잔이 이런 마술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킬 줄이야. 물론 이 달달함이 지나면 또 우울해지고 슬퍼지겠지만 잠시라도 다시 일어날 기운을 줘서, 퇴근해서 가족들 앞에서 지나치게 우울해하지 않고 내 슬픔 감정을 잘 처리하고 있다며 미소 지을 수 있는 힘을 준 ‘미제 코코아’가 고맙다. 


단순히 설탕이 주는 힘만이 아닐 거다. 코코아의 설탕이 내 뇌를 자극했다면, 미제 코코아 강하게 연결된 울 엄마의 사랑, 그 사랑이 내 영혼을 터치했을 거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이미 내 아내로부터 내 아이들로부터 충분히 받고 있었다. 내가 그 사랑을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을 뿐.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마음에 내 일을 향한, 가족을 향한 열정이 샘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누구든지 이 글을 잃는 분들에게 동일한 은혜와 복이 있기를 빌어 본다.  


집에 와보니, 지인이 보낸 선물상자 속에 달달한 과자들이 가득하다. 힘들고 우울할 때 드시라고 보내 준 그 사랑에 다시 한번 감동한다. 한숨과 우울감을 기도와 찬송으로 바꾸어 다시 돌려 드릴 시간이다. 아마도 병원 채플린은 내 천직인가 보다. 도망갈 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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