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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석 Apr 29. 2023

기적 같은 공존

아침 출근길에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병원에서 직원들의 사고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온 것이다. 요약하면, 지난 4월 25일과 26일 사이에 내가 코로나 19 환자와 밀접 접촉을 했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면 검사를 받고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안내문이었다. 지난해 12월 코로나 확진 이후 또 한 번 코로나에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특별한 증상은 없었다. 다만, 어제오늘 기침을 시작하면 좀 심하게 해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알레르기 시즌과 겹쳐서 증상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튼 검사를 마치고 절차에 따라 여성병원에 있는 사무실에서 격리하며 이 글을 쓴다. 코로나 19로 확진자와 밀접접촉이 일어났던 지난 화요일과 수요일은 공교롭게도 6년 정도 되는 내 병원 채플린 생활 가운데 24시간 안에 일곱 분의 죽음과 함께 했던 날이었다. 코로나 때 일주일에 일곱 분이 돌아가신 경우는 있었는데 24시간 안에는 처음이다. 


모든 죽음이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받아들인 만한 상황도 있다. 나이가 들어서 병이 들고 병원에 와서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판단을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때가 그렇다. 더욱이 환자가 그 상황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다면 채플린 입장에서도 위로와 돌봄이 수월하다. 물론, 임종 때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도 그만큼 수월해진다. 일곱 분 가운데 네 분이 그랬다. 네 분 모두 환자 혹은 가족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인공호흡기를 떼는 순간에도 상실에서 오는 슬픔 외에 죄책감은 없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호흡기 문제로 죽은 영아나 머리에 총상을 입어 뇌사에 빠진 30대 청년이 장기를 기증하며 떠나는 자리에 함께 하며 가족들을 돌보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괴롭다. 특히, 장기기증자의 10대 여동생이 수술실로 옮겨지는 오빠의 마지막 모습에 그만 바닥에 쓰러져 몸을 뒤틀며 오열을 토했다. 그러자, 울음을 참고 있던 수많은 가족들이 동시에 무너졌다. 순간 엘리베이터 앞은 통곡의 벽이 되었다. 그저 함께 울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떤 말도 어떤 몸짓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밤을 보내고 이튿날 여성병원에서 만난 산모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둔 딸아이를 안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곁을 지키던 시어머니를 위로하고 죽은 아기와 산모 곁에서 조용히 기도했다. 자녀의 죽음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상상이 안된다. 그저 마음이 무너질 뿐. 반대 경우도 그렇다. 50대 여성이 심정지로 병원 응급실에 이송된 뒤 내과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다시 심정지가 와서 더 이상 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20대 아들과 며느리가 그 곁을 지켰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아들은 거의 실신상태였다. 그러나, 더 이상 심폐소생술이나 연명처치가 오히려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의사와 나의 설득에 결국 모든 처치를 중단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뒤 환자는 영면에 들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사건으로 외상을 입거나 심정지가 와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가족과 주변 의료진들에도 큰 영향을 준다. 그야말로 급성 애도 반응을 촉발한다. 이런 자리에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이차적인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3일이 지났지만, 장기기증 환자의 여동생의 비명과 오열, 잠든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신생아의 푸른 입술, 심정지로 갑자기 죽은 엄마 곁에서 벌벌 떨며 오열하던 아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내 가족과 아이들을 떠올린다. 나도 우리 가족도 언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총기사고가 빈번은 미국에서는 더 그렇다. 그저, 오늘 지금 나와 내 가족이 이 땅에서 웃으며 저녁 밥상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 


퇴근 무렵에 병원 어카운트를 확인했다. 아직 갚지 못한 의료비 청구서 사이로 코로나 19 테스트 결과 링크 가보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링크를 열었다. 

"Negative"  

음성이다. 


이제 주말이다. 아침저녁으로 아직 쌀쌀하지만 낮에는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 로스에서 흙 사다가 화분가든에 새 식물들을 심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퇴근하는 길에 주차장 앞 큰 나무에 새싹이 움트고 있다. 그런데  그 새싹 사이로 자세히 보니 겨우내 말라죽은 나뭇잎이 그 가지에 여태껏 붙어 있다.  


'참 기적과 같은 공존이다' 

 

죽음은 삶 속 도사리고 있다. 독사처럼 언제든지 삶을 위협하면서. 근데 더 신기한 것은 죽음도 그 삶에 기대어 있는 건 아닌가,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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