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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말이 Mar 05. 2020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힘

소심이의 관계 이야기

“사람들은 왜 나도 상처 받는다는 걸 모를까?”


 성격이 활달해서 모임이 있을 때면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낯도 잘 가리지 않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잘 다가가고 그렇게 새로운 멤버로 잘 적응시켜주기도 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누구든 친구를 편하게 대했고 누구와도 허물없이 잘 지내는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술자리에서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가끔도 아니고 자주 격 없는 관계에 버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격이 없어지다 보면 서로 간에 조심성이 없어진다. 그러다 보니 상처가 될법한 농담도 하게 되고, 도가 지나친 장난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는 평소의 이미지가 있으니 지나친 농담과 장난에도 내색하지 못하고 속만 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곪고 곪아 늦게서야 터져버린 감정인걸 알기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친구의 말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친구에게 끝내 못했던 한마디가 있다.     


“결국 네가 선택한 거야” 

    

 친구와 나사이의 싸움으로 번질까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얘기하기로 다짐하며 끝내 하지 못했지만, 나도 친구와 비슷한 경험으로 힘들었던 적이 있기에 해답 또한 명확히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소심한 성격 탓에 어딜 가도 ‘인싸’는 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소속감이 강해서 어느 모임이든 모임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감수하고 궂은일도 도맡아 했다. 그러다 보면 손이 필요할 때면 누구든 당연하게 나를 찾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그런 대우에 속상함을 느꼈다. 내가 이 곳에 필요한 이유가 손 하나를 덜기 위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궂은일이라곤 손하나 대지 않으면서도 모두와 잘 지내며 활동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괴리감에 관계에 대한 허무함을 느꼈다. 착하게, 열심히보다는 서글서글한 성격이 더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서글프게까지 느껴졌다. 결국 서글한 성격도, 재미난 언변도,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없는 나는 쉽게 환영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말라는 것이니 말이다. 온전한 나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만큼 슬픈 현실이 또 있을까. 

     

 그렇게 관계의 허무함을 느낄 때면 감정이 회복될 때까지 나만의 벽을 쌓고 은둔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러다 아픔이 무뎌지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 벽을 허물고 다시 사회로 복귀했다. 새로이 복귀를 다짐하면서 앞으로는 적당한 소속감을 유지하고자 생각했다. 그러면 관계로 인해 상처 받을 일도 없고 궂은일에서도 조금은 해방될 것이라 믿었다. 뻔하게도 그런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덧 나는 예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 되어있었고, 주변 사람들도 똑같이 나를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상처 받고 벽을 쌓으러 돌아가면서 이내 저번에 쌓았던 벽을 왜 그렇게 완벽히 허물었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되었다. 벽이 남아있었다면 이처럼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진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가 됐다. 절반 정도만 부수었어도 새로이 쌓는 수고도 덜했을 테고, 허무는 수고도 덜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세상에 나왔다가 힘든 여정 끝에 돌아오니 집의 모든 벽이 허물어져있는 꼴이었다. 늘 세상이 버겁고 치유도 힘든 이유였다.     


 집에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나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것은 벽이 있기에 가능하다. 벽은 위협의 대상에게 넘어서는 안될 경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물리적으로도 위협을 막아준다. 그럼에도 벽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집 밖이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외부라는 것을 나에게 인지시켜주는 것이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 그러니 집 밖에서는 언제 다가올지 모를 위험을 조심해야 하고, 늘 긴장해야 한다. 그런 외부와 집의 경계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 마음의 벽이다. 그러니 당장의 상처가 치유되더라도 늘 마음의 벽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벽이 남아있다면 외부의 위험에게 경계가 있음을 알릴 수 있고, 나도 명확한 선을 두고 행동할 수 있다. 이따금 들려 잠시나마 기대어 쉴 수도 있다. 벽을 완전히 허무는 것은 아무런 보험 없이 나를 밖으로 내모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그러했고 그렇게 상처 받아왔다. 나도 그러했고 친구도 그러했다.   


 친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처럼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었다. 상처가 없을 때면 벽 따윈 모두 허물어 버렸던 것도, 아무런 보험 없이 밖으로 나를 내몬 것도 오로지 나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상처 준 사람에게만 야속함을 느낀다. 왜 적당한 선을 지키지 않는 건지 상대방의 성격을 탓한다. 아무런 긴장 없이 경계를 넘어선 것은 자신인데도 말이다. 더욱이 상대는 아무 표시도 없는 남의 땅에서 스스로 경계를 찾아내기도 힘들다. 나는 강한 소속감과 소심한 성격 혹은 자격지심으로 나를 스스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왔다. 친구는 서글한 성격과 분위기 메이커라는 평소의 이미지를 지키고자 자신을 격 없고 시원시원한 사람으로 만들어왔다.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형성하고 관계를 맺어오면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버렸다. 벽을 허물고 밖으로 나왔으니 안락한 집이 아닌 외부세계라는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위협이 다가오면 늦게나마 경계심을 가지지만 결국 상처 입게 된다. 그럴 때면 돌아갈 집도 없어 다시금 벽을 쌓아야 하는 수고가 기다리고 있다.   

 사람 간의 관계는 늘 어렵고 오히려 외롭다. 당장 눈앞에 위협이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의 벽을 완전히 허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럴수록 앞으로 다가올 상처가 있음을 알고 이를 막아줄 벽을 쌓고 집을 더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가지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면 위협이 다가와도 대비할 수 있고, 무난히 피해 갈 수 있다. 벽으로만 둘러싸인 집에 살 순 없으니 몇 개의 창문도 만들고, 테라스 같은 열린 공간도 만든다면 더 좋겠다. 창문이 있다면 미리 밖을 내다볼 수 있고, 테라스가 있다면 거리를 두고 밖과 교감할 수도 있다. 관계로부터 나를 지켜줄 마음의 벽은 늘 존재해야 하고, 집으로써 더 가꿀수록 쉽게 나를 지키고 관계에도 능숙해질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경계를 알고 그곳을 벗어날 때면 긴장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의 벽은 가장 좋은 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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