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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Apr 25. 2024

쿠폴라로 오르는 계단의 비밀

그림 이은숙

전화벨이 울리고 항공편 시간을 확인하려는 여행사 여직원의 친절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남편은 걱정스럽게 장거리 여행이 괜찮을까 거듭 묻지만 안내받은 여행자 보험은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여행을 기대하게 하고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까지가 그녀의 일이고 고객의 건강 상태까지 책임질 일은 없다. 건강할 때도 나서지 않았던 해외여행을 신체가 불편해지고서야 강행하려는 철학자를 남편은 차마 말리지 못했다.


목적지는 이탈리아다. 그것도 일주 여행이다. 서고의 무거운 지도책을 불편한 손으로 힘겹게 펼쳐보는 얼굴엔 생기가 돌고, 지도의 지명을 꾹꾹 눌러가며 천천히 발음해 보는 입술은 옛 “지명사전”을 읽던 독자의 흥분을 지녔다. 알베르토 망겔을 지도했던 그 책은 아직 “세계를 여행한다는 것이 모험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탄생했고, 아무것도 읽지 못하는 차가운 병실 조명 아래서 철학자는 망겔과 그 친구가 기록해 둔 상상의 장소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때는 이탈리아의 이 모든 도시들이 망겔의 사전 속 지명들과 다를 바 없었고, 지금은 그 “상상의 지리”를 두 발로 탐색할 순간에 설렌다.


밀라노 이곳엔 철학자의 조카가 산다.

베니스 이 아름다운 수상도시에서는 세계적 비엔날레가 한창이고 세계가 인정한 블라인드 작가도 곧 만날 예정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유혹하는 붉은 지붕의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하는 대열에 오렌지 도트 문양 원피스 차림의 철학자가 서있다.

로마 이 고대도시에는 무수히 많은 유적들이 있지만 오로지 한 곳, 바티칸의 전망대를 걸어서 오를 것이다.


무수한 여행객들의 걸음에 밀려 위험천만한 그 계단을 철학자는 계획한 여정대로 걸어 올라갔다. 느리고 어눌한 걸음에 뒤따르는 누군가가 재촉할만했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언어도 다르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고마운 만큼 미안함도 컸기에 철학자는 쿠폴라까지의 완주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통하지 않을 ‘미안해요’를 기도문처럼 반복하며 다시 힘내어 불편한 걸음을 내딛는다. 나선형 계단 사이사이 숨은 벽감들에서 천사의 형상이 세미한 소리를 입고 아른거린다. 이 세계의 언어들과 뒤섞여 뚜렷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대략의 내용은 병상에서 떠올렸던 망겔의 오즈를 그리는 듯했다.


“오즈의 본래 주민들은 어느 지역 출신이든 비슷한 생김새였던 것 같다.”


철학자를 앞서고 뒤따르는 각양 머리색의 사람들도 오즈에서 왔을까. 좁디좁은 계단을 오르면서 모두가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망겔의 사전에는 오즈에 없는 몇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질병과 가난과 죽음과 돈의 부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오즈엔 또 하나 없는 것이 있다. 경쟁이란 낱말이 없다. 먼저 오르려고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법이 없다. 어느새 철학자도 오즈의 시민이 되어 있었다. 힘들었지만 바쁘지 않고 평화롭게,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베드로의 쿠폴라에 올라 경쟁하는 도시의 잔해를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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