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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Jan 30. 2024

시인의 낱말

그림 이은숙

아빠와 친구의 이름 정도 겨우 소리 낼 수 있는 철학자는 습관처럼 서고로 들어선다. 아카시아 나무를 네모반듯하게 잘라 만든 도어벨에는 서고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철학자와 잃어버린 친구의 이름을 함께 새겨둔 것이다. 


...미...정...의...서


아침 운동하듯 천천히 네 글자를 또렷하게 내뱉은 후 문을 연다. 벨소리가 은은하게 철학자의 방문을 알린다. 잘 정리된 서고 한 층에 툭 튀어나온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한 동안 꼼짝없이 책장 사이에 갇혀 지내던 활자들이 철학자의 말소리로 되살고 싶어 스스로를 서고 밖으로 밀어냈나 보다. 아직 서툰 발음으로 낡은 책등의 기호들을 소리로 엮어본다. 


...벼...ㄹ...헤...느...ㄴ...바...ㅁ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 하나씩을 잇대던 시인이 자신 같아 학창 시절 아껴 외우던 시의 낱말들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오래된 페이지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수없이 반복해 되뇌었던 그 소리들을 무사히 기억해 낼 수만 있다면 잃어버린 활자들의 소리도 돌아오지 않을까. 하늘의 별을 세던 시인의 간절함으로 철학자는 책장 속 낱말 한 자 한 자를 정성껏 소리 내어 본다. 


...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노...루...


아빠를 그리던 그 시절, 외로운 철학자에게는 강아지, 갈대, 철새, 잠자리, 바람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낡은 시집을 따라 읽으며 '추억, 사랑, 쓸쓸함, 동경, 시' 그리고 아빠의 이야기를 쉼 없이 쏟아낼 때면, 말없이 들어주기만 하던 옛 친구를 되찾은 것만 같았다. 흙으로 빚은 친구는 그렇게 처음부터 '정해지지 않은' 얼굴로 나타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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