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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사가 May 20. 2023

누군가의 죽음


옆자리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경사는 잘 가지 않지만 조사는 꼭 가려 노력하기에 이번에도 부모님께 아이를 부탁하고 대전까지 다녀왔다.


이제는 결혼식보단 장례식이 더 가까운 나이다. 다만 좀 이르고, 그래서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긴 기간 투병에 힘들어하셨고 가족들도 일찍부터 준비했다는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도 호상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잘 안 나오는 이유도 맞닿아있다.


내 또래엔 흔치 않은 (여자)외동으로 자랐다. 지금껏 남들 보기에 호사스럽게 컸다. 물질적으론 빠듯했을지 몰라도 정신적인 보살핌은 그 누구보다 넘쳤다 생각한다.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동료 선생님들은 하교 담당은 할아버지, 엄마 퇴근 전까지 돌봄은 할머니, 퇴근 후엔 각자 집으로 시스템화되어 있는 환경을 부러워한다. 9년째 계속되는 이 도움을 옆에서 지켜본 선배선생님은 "자기 어머니는 전생에 자기한테 중죄를 지으셨나 보다." 농담처럼 뼈 있는 말을 건네신다.


장례식장을 가면 언젠가 내가 마주하게 될 일에 벌써부터 겁이 난다. 상주는 슬퍼할 시간도 없이 바쁘다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다. 받은 사랑이 큰 만큼 후회도 클 텐데 그것도 너무 두렵다. 남편이 있지 않냐 이야기들 하지만 내가 사랑받은 시간을 남편과 공유하기는 어렵다. 형제자매가 있다면 어느 날 문득 엄마아빠가 생각날 때 "우리 엄마가 옛날에 그랬던 거 기억나? 우리 아빤 그때 왜 그랬을까?" 서로 나누기라도 할 텐데, 나는 긴 시간의 추억을 오롯이 혼자 껴안고 곱씹어야 하는 게 버거울 것 같다. 그 큰 사랑의 무게를 내려놓는 방법을 아직은 모르겠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게 인간이라지만, 또 탄생도 죽음도 내가 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마음 역시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 무섭다. 엄마아빠의 부재가 현실이 되고, 기억이 되는 그때가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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