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몰이
내가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내게 사랑스러운 순간들은 내게 더 현존할 테고, 햇살처럼 빛날 테니까.
알라딘에서 내게 책을 보내주었다. 난 주문한 기억이 없는데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주문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반가운 이름이 눈에 띄었다. 내 글쓰기 스승님인 친한 동생이 보내준 책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카톡을 보냈다. 내가 생각나서 주문했다는 그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책을 들고 카페에 갔다. 살짝 들뜬 마음으로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직감했다. 이 책은 한 달 정도는 정독해야 소화할 수 있겠다는 걸...
한 시간 동안 열 페이지를 간신히 읽었고 그중에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문장을 가져왔다.
'내가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내게 사랑스러운 순간들은 내게 더 현존할 테고, 햇살처럼 빚 날 테니까.'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글쓰기는 사유의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의미를 전하는 사람이기보단(그럴 그릇도 안되지만) 의미를 찾아가는 방랑자의 태도로 글을 써보겠다.
먼저 <불행하면 불행할수록>과 <현존>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불행할수록 현존한다라는 말은 상황이 이전보다 악화될수록(신체적, 감정적) 지금 이 순간을 누린다는 이야기라고 해석했다. 흔히 얘기하는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 더 수용적인 태도 같다고 해야 할까. 자책할 만큼 자책해보고 부정할 만큼 부정해 본 후 모든 걸 내려놓고 수용하는 자세처럼 느껴졌다.
<내게 사랑스러운 순간들>은 불행 이전의 추억이라기보단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라고 해석해봤다. 나는 올해 3월경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후각이 마비되었던 적이 있다. 아마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던 적이 있다면 다들 비슷한 증상이었을 것이다. 후각이 마비되니 미각도 느껴지지 않고 자가격리로 밖에 나가지도 못하니 불편하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어쩌면 세계 1차 대전 중 하반신 마비로 평생을 침대에서 보낸 작가의 <내게 사랑스러운 순간들>이라는 표현은 특별하고 강렬한 기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의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내가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나는 언제나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 갑자기 신한부 판정을 받을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항상 조심하는 태도를 지녀야겠지만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꽤 오랜 시간 저 문장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억울할 것 같다. 인정하지 못할 것 같다. 아마 우울증에 걸려 폐인이 될 수 도 있다. 내가 불구가 된 후에도 <햇살처럼 빛날 테니까>라는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세 번째 단락과 네 번째 단락에서 써놨던 수용하는 삶,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내 생각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나의 모순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다. 감히 내가 판단할 수 없는 문장이다. 지금 내가 운운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내가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경외심이지 않았을까?
앞으론 보기 좋은 말로 치장하지 않아야겠다. 막상 내게 큰 불행이 닥친다면 난 이 문장을 쓰지 못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