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몰이
사람이 의도를 가지는 것은 전등에 갓을 씌우는 것으로, 자신의 비열함을 차마 볼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다. 감상들, 감정들, 계획된 심리적 의도들. 인간의 유일한 정통한 정열 속에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그 모양으로 생긴 자기 자신을 보는 두려움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플러스 감정들로 무장시켜놓았던 마음이 해체되었다. 숨기기 바빴던 깊은 슬픔이 입꼬리를 무겁게 가라앉힌다. 미간이 찌푸려지며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외면하고 싶은 기억과 죽음에 가까운 감정들이 올라온다. 나라고 규정지어 놓은 모습에 걸맞지 않은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다.
나는 환상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내가 규정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올라올 때면 죽을 만큼 괴로워한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내 환상이 깨지는 것이었다. 나의 나약함을, 추악함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어야 하니깐.
인간은 모두 이중성을 띄고 있다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직접적으로 경험을 할 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감정들을 깊은 구덩이에 던져버리곤 외면했다. 혹여나 그 감정들이 기어올라올 땐 술로, 게임으로, TV로 잊으려 부단히 도망쳐왔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저 구절 뒤에 <악을 알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걸로 됐다>라며 장을 마무리한다.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맥락적으로 해석하자면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되는 것일까. 내 입맛대로 바꿔본다면 스스로 만들어놓은 환상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허용 범위의 확장. 지금까지 환상 속의 나는 창조성이 뛰어나야만 하고 누구든지 인정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면 누구도 나한테 관심을 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가끔은 말의 앞뒤가 다를 수 있는 사람, 가끔 손으로 똥을 싸는 것 같은 글과 그림도 그릴 수 있는 사람. 때론 비열하고 계산적으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
완벽하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
환상을 깨기엔 내가 성숙하지 못하다. 내 입맛대로 환상의 확장을 하다 보면 확장의 끝과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되어버릴 때 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말을 조금은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