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Unsplash, grace
그래, 나도 안다. 성우학원만 안 다니면 돈이 모일 거라는 거. 한 달에 40만 원이니까, 1년이면 480만 원에, 2년이면 천만 원 가까이… 나도 이 정도 계산은 된다.
“그래서, 너 성우 될 거야?”
성우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당연히 이게 가장 궁금하긴 하겠지만, 저기에 대고 “될 리가 있냐~”하고 웃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나는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내가 성우학원에 다닌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자꾸 나의 ‘투자’에 ‘아웃풋’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데, 여기서 아웃풋은 성우가 되는 것. 그래서 투자한 만큼 뽑아내는 것, 딱 그뿐이다.
휴직해서 생활비나 겨우 버는 주제에 적금 깨 가며 월 40을 쓰는 나는, 겨울이 닥치면 개미들에게 비웃음을 살 베짱이다. 개미들에게 내가 무엇을 배우는지, 오늘은 얼마만큼 새로운 소리를 익혀 보았는지, 그게 내 자신감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얼마만큼 새 대본에 몰입해 보았는지, 그때의 내 기분이 어땠는지 구구절절 읊어봐야 딱한 시선이나 받을 터. “그래, 넌 너 하고 싶은 거 해서 좋겠다~” 하는 친구의 이 말속에는 괄호가 하나 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그 괄호 안에 든 말은 “속도 없이”가 틀림없다. 흥. 절대로. 앞으로도 비밀이야.
학원에 다니며 내가 '얻은 것'들을 나열하고 40만 원에 ‘상응하는 가치’ 따윌 운운하고 싶지는 않다. 이건 설득의 문제가 아니고 내 삶의 방식일 뿐이다. ‘마이 웨이 my way’란 말이다. 맞다. 나는 아마 좀 쌀쌀할듯한 내 노후를 앞에 두고 ‘가망 없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중이고, 꽤 만족스러움을 넘어 행복하다. 학원비로만 쓰겠노라고 모아둔 돈이 0원을 향해 달려갈 때까지. 난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책에 대해 그 어떤 주제도 없이, 그 어떤 생각도 없이 있기, 그것은 책 앞에서 자기 스스로를 발견하기, 스스로를 되찾기다. 텅 빈 광활함. 잠재적 상태의 책. 무(無) 앞에 있기. 마치 살아 있는 알몸의 글쓰기 같은, 끔찍한, 끔찍하도록 이겨 내기 힘든 것 앞에 있기. 나는 믿는다, 쓰는 사람은 책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손이 비어 있고, 머리도 비어 있다. 쓰는 사람이 책의 모험에 대해 아는 것은 미래도 반향도 없는, 멀리 있는, 철자법과 뜻이라는 기본적 황금률로 주어지는 메마른 알몸의 글뿐이다. _ 윤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중*
나는 때론 글쓰기가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라는 사람은 “쓰기 전에 쓰게 될 것에 대해 알 수 있다면 절대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쓴다는 것은, 정말 쓰게 된다면 무엇을 쓰게 될지 쓰고 난 이후에만 알 수 있는 것을 알아보는 일이다. 쓰기 전에는 가장 위험한 질문이다. 하지만 가장 흔히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라는 문장을 썼다. 글은 쓴다는 것이, 그렇단다. 그러니까 이 사람 말에 의하면, 쓰는 사람도 쓰는 게 뭐가 될지 모른다잖는가. 물론 글쓰기는 성우학원과 달리 돈이 안 들지만.
나는 지금 ‘내가 성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가느다란 희망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의 삶이란 언제나 불확실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고, 불안이 거기에서 오듯이 기쁨도 거기서 오는 것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우리가 언제부터 가망 있고, 투자가치 확실하고, 리스크 없는 일들에만 매진하게 되었나. 나는 “그만큼 투자했으면 뭘 얻어 내야지.”라는 말 앞에 서면, 죽은 우리 아빠 통장을 해지해주며 구시렁대던 은행 직원이 생각난다. “갖고 오신 서류 떼는 돈이 더 들었겠네요.” 그 사람은 그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아빠 통장엔 오백 몇만 원이 아니라 오백몇 원이 있었으니까.
가망 없는 일. 작품이 되지도 않을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 같은 것엔 나갈 수도 없는 스크랩 북을 채우고, 문학이 되지도 않을 글을 쓰는 것. 거기에 영원히 살지도 못할 삶을 사는 것 자체가 가망 없는 일이고, 그래서 좋은 것이다. 모두가 한 가지에 매진하여 ‘뽕을 뽑을 만큼의’ 전문가, 전문직이 되는 것만이 전부라면 세상엔 바보만 득실거리게 될 것이다. 전문가가 될 가능성은 없는 일들을 그냥 어설피 해내는 인간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작가가 되지 못할까 봐 펜을 들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 떨지 않고, 세상의 아픈 곳을 보는 혁명가들도 실없는 취미생활을 하며 좀 웃지. 그래야 사는 게 좀 사는 것 같지.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구나.’ 나 자신이 좀 좋아지지. 얘기가 좀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러면 밥할 줄을 몰라 굶는 할아버지들도 줄어들 것이다.
“해준아! 기뻐서 하면 그걸로 된 거야! 그러다가 언젠간 쓰일 일도 생겨. 꼭 성우가 되지 않더라도.”
된장국에 숟가락을 묻고 휘저으며 “엄마, 나 월 100도 못 벌어서 어떡해? 성우학원 안 다녀야 하는 거 아닐까.”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는 내게 엄마는 저렇게 말했다. 엄마의 대답에, 나는 바로 웃음이 나와 버렸고 덩달아 대답까지 했다. “응. 맞아. 나 기뻐서 하는 거야!” TV 속의 엄마들은 늘 나 같은 딸의 등짝을 때리던데, 우리 엄만 TV 밖의, 그렇지 않은 엄마들 중 한 명이다. 우리 엄마, 김정임은 나이 사십에 다시 대학에 가 피아노를 배웠다. 그리고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다. 그건 나이 사십에 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건 누구보다 엄마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피아노가 좋았고, 아빠는 TV를 보다가도 엄마 피아노 소리가 겹치는 것에 개의치 않을 정도로 “당신이 피아노 치는 거 좋아”했고, 나는 그런 엄마가 단소까지 배워 내가 다니던 중학교 학부모 방과 후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게, 그리고 지금껏 교회에서 반주자로 애써가며 손이 굳지 않게 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나는. 내가 쓴 글을 내가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해보니 그뿐이다. 글을 쓸 때마다 꼭 시간을 들여 한 번씩 읽어보고 있으니, 나는 벌써 하고 싶은 걸 다 이룬 셈이다. 매일매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학원까지 다니고 있으니, 내 읽기는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벌써 이루어진 내 꿈은 조금씩 더 견고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는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닮아가는 거야. 우리 자신이 보고 싶은 미래 자체가 되어가는 거지. 그래서 내가 '가장 아름다운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내 마음속의 생각은 우리가 변화해야만 그날이 온다는 것이었어. 우리가 변화해야만 세상이 아름답게 바뀐다는 말이었어. 이것이 희망을 이 사이에 넣어둔다는 말이야. 희망을 깨문다는 말이야. 희망은 별처럼 먼 곳에 있지만 그 별을 입으로 옮겨놓는 거야. _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거창한 미래 같은 건 필요 없다. 느슨한 미래가 우리를 지금에 머물게 한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어버린 지금을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적금이 바닥 날 올 7월까지는 어찌어찌 최소한의 생활비로 입에 풀칠만 하자. 다행인 것은, 입에 풀칠을 하더라도 연습을 하려면 입을 열 수밖에 없으니… 최소한 목구멍이 막히는 일 같은 건 없을 거란 거!
*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민음사, 2019. 내용은 17쪽 중에서.
** 정혜윤 지음, 사생활의 천재들, 봄아필, 2011. 내용은 24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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