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는 1인당 3권의 책을 신청할 수 있는 희망도서 서비스가 있다. 달마다 3권! 도서관에 없는 책이면서 신청 부적합 기준에 해당하지 않으면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원하는 책을 받아볼 수 있다. 방법도 간단하다.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신청하고, 책이 우리 동네 도서관에 도착하기까지 까먹고 있으면 된다. 살짝 잊어버리고 있어야 “신청하신 희망도서가 도착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함박 웃을 수 있다. 가끔은 까악까악도 웃는다. 삶이 평평해질 무렵 받는 희망도서 도착 메시지만큼 자극적인 게 또 있을까! “아, 맞다~! 이런 책이 있었지!” 문자를 받고 일상의 틈을 찾아 도서관에 들르기까지 쭉 설렌다. 대단한 걸 약속받은 사람처럼.
요새 같은 때 책 기다리는 경험은 흔치 않다. 인터넷으로 책을 사면 다음 날 아침에 오고, e-book은 사자마자 볼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럼 도서관은 매번 책을 기다리느냐? 그것도 아니기 때문에 책을 기다릴 일이 생기면 그걸 행운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웬만한 신간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책을 이미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에서 ‘없는' 책을 발견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어야만 희망도서를 신청할 자격이 되고, 나랑 같은 책을 읽고 싶어 했던 사람이 동네에 한 사람 이상 있어야 도서 예약 버튼을 눌러 그다음 차례가 나라고 찜 해둘 수 있다. 앞 사람의 연체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경험까지도 ‘앞 사람'이라는 행운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책을 기다릴 일이 생긴다면 그건 말 그대로 호사(豪奢)다.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호사.
책을 빌려 왔다가 제자리에 데려다 놓기를 반복하는 즐거움은 내 공간에 나만의 서가를 꾸릴 때의 흐뭇함과 사뭇 다르다. 소유보다 가볍고 소유할 수 없기에 부요해지는 오묘한 기분. 내가 지금 펼쳐 든 책이 다른 누군가가 먼저 보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앞으로 볼 책이라는 사실이 주는 묘한 유대감. 도서관에는 이런 벅참이 있는 듯 없는 듯 찰랑거린다. 나는 그 찰랑거림 속에 가볍게 발을 담그고 희망도서를 신청한다. 책이 도착하면, 막 도서관 인장이 찍히고 표지와 책등에 투명한 새 스티커를 붙인 책을 제일 먼저 받아보며 한 번 째지고, 내 희망도서가 신간코너에 꽂혀 있는 걸 보고 두 번 뿌듯해진다. 내가 여기 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책 한 권을 골라 소개한 것만 같다. 또 그 책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면 마치 내가 작가님을 응원한 것 같고, 아니, 이 책 자체를 응원한 것도 같고. 이 책이 신간도서 코너에서 새 책의 각잡힌 자태를 뽐내도록 말이다. 내 돈으로 산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내가 다 내는 이런 과정을 나는 벌써 열 한 번이나 했다.
이번에 신청한 책은 신청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다음 달 초에나 올 줄 알았는데! 휴무일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얼른 가방을 들고 나섰다. 비 오는 평일 오후. 도서관엔 창문에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와 사서 선생님의 발소리로만 조용했다. 지난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희망도서 칸이 이용자들도 볼 수 있는 눈높이로 올라왔다는 것인데, 나는 그 칸에 정연하게 꽂혀있는 책들의 기운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런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희망하는 책, 누군가가 바라는 책, 누군가가 보고 싶어 한 책들이 꽂힌 칸에서 벅찬 설렘이 꽉 차다 못해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책들도 희망하고 있었다. 저를 신청한 누군가를.
나이가 지긋하신 사서 선생님이 안경을 다시 써가며 책등에 적힌 책 이름을 읽는 데 시간을 들이는 동안, 나는 저 희망 도서들이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들인지와 ‘희망'이라는 흔한 말이 이렇게 빛나는 말이었는가를 생각했다. 저 책들은 자신들을 희망한 누군가를 만나 자기를 열어 보인 후, 새 옷 빳빳이 입은 책들만 들어갈 수 있는 신간 코너에서 모두의 눈길과 손길을 받는 전성기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신간들에게 담담히 자리를 내주며,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차분히 서가에 들어가 앉아 오래오래 사라지지도 않고 존재하겠지. 이번 희망도서 칸에서 책을 데려가는 건 내가 처음이었고, 내가 신청한 책들은 표지만큼이나 화사한 얼굴로 뽑아져 나와 자랑스레 내 가방에 담겼다. 보아하니 나의 첫 대출로 다른 책들의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한 것 같았다. 그 반짝거리는 모습들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알게 되었다. 책을 고른다는 것은 무언가를 희망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바로 프로 희망 피커라는 것을.
202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