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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Apr 29. 2023

물에 담근 각설탕

10년 묵은 짝사랑의 끝

  내 마음에는 오래된 각설탕이 하나 있다. 몇 번씩이나 녹았다가 굳은 딱딱한 각설탕. 똑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버렸을 텐데, 마음 한구석에 끈적하게 눌어붙어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건 내 ‘직업의 덩어리’다. 내가 사랑하고, 미워했고, 내동댕이쳐버리고 싶어 하다가도 차마 그럴 수 없었던 나의 일 그 자체. 갓 입사했을 무렵엔 포슬포슬해 보이는 표면이 빛에 따라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었는데… 가끔 달콤한 부스러기 같은 것도 떨어지고 그게 아주 기뻤었는데… 그랬던 것이 이제는 마치 지옥에서 올려보낸 용암 덩어리마냥 끈덕끈덕하고 누렇게 변했다. ‘속에 뭔가 꿈틀거리는 게 들어있는 건 아닐까’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비주얼로….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혹시 예정되어 있었던 걸까? 다들 이렇게 변해버린 각설탕을 안고 사나? 제일 궁금한 건, 퇴사한 지 2년이 훌쩍 넘었는데 님 여기 왜 계속 계시는지…?


  이 각설탕이 지난 2년간 한 일은 딱 하나, 내가 새 일자리를 구하려고 할 때마다 저주라도 걸린 것처럼 달그락거린 것이다. 얘가 달그락거리는 날엔 눈물이 폭포수처럼 솟고, ‘이게 뭐여….’ 눈물을 훔치면서 살펴보면 보통은 거기에 억울함과 슬픔이 있었다. 이제 같은 분야의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나고, 어딘가에 속하기 싫은 것도 나고, 돈은 좋지만 일은 싫은 것도 나고, 그래서 적당한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해서 살길 원하는 것까지 전부 내 선택임에도 ‘나는 어째서, 여태 일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거야?’ 같은 맥락 없는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억울하다는 건 뭔가가 내가 한 만큼 돌아오지 않았다는 싸인이고, 슬프다는 건 얻지 못한 것들이 무척 아쉽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뭘 그렇게 돌려받고 싶었을까. 뭘 얻고 싶었을까.


  소규모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데엔 돈도 명예도 따라오지 않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내가 왜 그 일을 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항상 “거기에 필요가 있어서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대답도 같았다. 이건 내가 특별히 이타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보다 남을 우선시하는 게 나에게 가장 이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말 거기엔 필요가 있었다. 항상 일손이 부족한 곳이 비영리단체다. 돈이 돌지 않는 분야기 때문에 더욱 극심…! 나는 일과 이 일을 하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일이 필요로 하는 것과 나라는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오래 지냈다.

  일은 나에게 ‘세상의 요구’와 같았다. ‘이걸 해야 세상이 바뀐다.’ 나는 거기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만 생각했다.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따져 묻지 않았다. 이제야 깨닫는다. “왜 이 일을 하나요?”라는 질문은 항상 나를 향하고 있었는데, 대답 속엔 내가 없었다는 것을. 나의 각설탕이 빛과 뽀송함을 잃은 건 거기서부터였겠지.


  생각이 이쯤 왔을 때 각설탕이 물에 빠졌다. 아주 퐁당 빠지더니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상상했던 끔찍한 생물체는 없었다. 그냥 달콤한 물이 되어 흘러갔다. 나는 10년 묵은 각설탕이 이렇게 한순간 녹아내리는 것에 놀라고, 내가 더 이상 이 일에 바라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 나는 이제 이 일에 바라는 게 없다.

  되고 싶은 상도 없다.

  설사 그런 게 있다 해도 다다를 수 없다.

  내가 아무리 퍼 줘도 상대는 나에게 줄 것이 없다는 벼락같은 자각. 내 짝사랑이 끝나는 순간! 각설탕은 형체도 없이 녹아서 사라졌다. 뽀글뽀글 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운명일수는 없었던 걸까~’ 같은 묘한 감정이 남아서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끝났다. 녹은 각설탕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알 것 같다. 퇴직하는 순간까지도 무겁게 나를 누르던 죄책감, 어디서 엄청나게 처맞고 진 느낌, 어딘지 실패한 기분, ‘지는 것은 어쩐지 싫으니까 그렇다면 힘들더라도 죽기까지 불살라야 하지 않나’ 같은 마음이 왜 자꾸 나를 집어삼켰는지. 일손이 좀 모자란다며 조심스레 건네오는 동료들의 부탁이 무거운 것도, 나에게는 그게 누군가의 부탁이 아니라 ‘세상의 필요’라는 커다란 이름으로 오기 때문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나를 세상의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한 패배자로 보는 한 내 각설탕은 끈적거리는 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내 뱃지함에 열다섯 개도 넘게 들어있는 장 회장 배지*는 나와 상대, 내 직장에 수없이 기회를 주면서 얻었다. ‘다시 해 보자, 이렇게 해 보자, 내가 참아볼게, 그럼 이번엔 안 참아볼까?, 이다음엔, 그럼 이번엔…’ 자꾸 기회를 준다는 것은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에 많은 것이 묻힌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부름에는 응답하는 나라는 인간. 공익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흐르는 나 같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더욱더 의식적으로 스스로의 필요를 살펴야 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뭘 원하나?

이 상황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 뭐야?
나는 뭘 요구하고 싶은가?
어떻게 해야 세상의 필요를 들어주면서도 나도 얻는 게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걸 받을 수 없다면, 그럼에도 그걸 상쇄할 만한 좋은 점이 있나?


이제 내 마음에 눌어 붙은 각설탕은 없다.
나는 각설탕이 있었던 자리에 레몬색 메모지 하날 붙여 두었다.

내가 사랑을 한다면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눈앞에 서 있는 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 테다.
그건 아주 작고 사소한 사랑일 것이다.**





2022.08.



*드라마 <이태원클라쓰>에서 빌런 장 회장은 주인공에게 끝없이 기회를 준다. 나는 거의 장 회장 급으로 사람들과 나에게 다시 할 기회를 많이 주는 사람이라 이 배지를 받았음. 열 다섯개도 넘게.

**이자람 지음, <오늘도 자람>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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