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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 Mar 27. 2023

쌍쌍바를 꼭 둘이 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결혼하지 않아도, 결혼해도 되는 삶을 살고 싶어서.

요즘 주변으로부터 내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부모님, 친구, 선배, 교수님 말할 것도 없다. 나이만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나의 일상과 나이를 결부지어 이야기한다. 예컨대 박사학위와 나이, 취미와 나이 등. 그 중 가장 나이와 함께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결혼이다.


내게 결혼은 언제쯤 할 것인지 묻는다. 나는 딱히 생각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약간의 긴장과 방어적인 태도를 준비한다. 이후에 설명해야 할 말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은 비혼주의자냐고 되묻는다.


내가 결혼이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비혼주의자냐고 묻는 사람들의 진짜 속내는 "결혼에 반대하니?"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결혼을 필수라고 여기고, 비혼주의자는 '결핍을 감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냉소적인 태도는 여러 경험에서 비롯됐다. 어쩌다 보니 주변에 결혼한 친구가 많다. 대부분 통상적으로 어린 나이에 결혼한 친구들이다. 몇 명은 벌써 아기를 낳기도 했고 몇 번의 결혼기념일을 챙기기도 했다. 그 친구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친구들은 만나고 올 때마다 "아, 이래서 결혼한 친구들이랑 멀어지는 거구나." 하고 씁쓸한 한숨을 내쉬게 한다.


그 친구들은 나를 설득한다. 결혼이 왜 좋은지, 결혼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아기가 있으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등. 심지어 결혼과 출산이 인생을 완성시킨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난 그런 사람들을 혼인주의자라고 부른다. 결혼이 필수적이며 결혼 없는 인생은 결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기 좋다 생각하곤 했다.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멋지다는 생각도 한다. 애석하게도 결혼한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기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에게 '언젠간 너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29살 밖에 안 됐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결혼을 필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위로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들을 혼인주의자라고 부른다.


혼인주의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혼에 대한 의지나 욕구가 생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우선 나는 아니다. 난 오히려 그들이 안쓰러워질 때도 있다. 그들이 타인의 삶의 방식을 틀렸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타인(배우자) 없이 자신의 삶을 완성시킬 수 없는 동시에 타인(비혼주의자) 없이 자신의 삶이 맞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렇지만 난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비혼주의자를 박해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이들도 있다. 예컨대 보수개신교, 딩크족이 사회보험부담을 높인다는 프로파간다를 펼치는 이들 등) 그들은 단지 배운대로 생각하고 보고 들은대로 말할 뿐이다. 혼인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을 뿐이다. 혼인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혹자는 언제, 누가 혼인을 강제했냐고 물을 것이다.


맞다. 누구도 혼인을 강제하지 않는다. 비혼이 불법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많은 제도들은 혼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법적 보호자의 지위를 얻을 수 있으려면 혈연관계이거나 혼인 관계여야 한다. 나는 3년째 여동생과 살고 있다. 나는 동생이 응급수술을 받을 때 법적 보호자로서 동의할 권한을 갖지만, 학교의 가족생활동 기숙사에 들어갈 수는 없다. 동생이 아플 때 가족돌봄휴가를 쓸 수도 없다. 신혼부부를 위한 주거복지는 많지만 혼외 반려자와의 삶을 위한 주거복지는 찾기 어렵다. 이 외에도 혼인제도에 의한 반려자가 없으면 생기는 여러 어려움은 수없이 많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혼인을 강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가 시민들을 일정한 훈련을 통해 역할과 정체성으로 호명한다고 말한다.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교과서의 삽화, 혼인가족을 중심으로 수립된 정책, 이성애만 정상인 것으로 그리는 미디어 등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는 우리를 '남편'과 '아내'로 호명한다. 시민을 결혼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약 300년 전에 여성교육의 목표가 오로지 결혼이었던 것을 비판하면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 대해서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3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삶에 대해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삶은 위에서 내가 나열한 삶이다. 주거 복지를 누릴 수 없고, 응급수술을 앞두고 법적 보호자를 찾아야 하며, 너도 언젠간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 위로받는 삶이다.


나는 결혼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만한 삶을 살고 싶다. 개인의 부, 노력으로 살만한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엄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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