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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쁨의 강물 Jun 05. 2022

#10. 40세, 가장 아름다운 나이

산중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곧고 잘생긴 나무가

가장 먼저 잘려서 서까래 감으로 쓰인다.

그 다음 못생긴 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서 기둥이 되고

가장 못생긴 나무는 끝까지 남아서

산을 지키는 큰 고목나무가 된다.

못생긴 나무는 목수 눈에 띄어 잘리더라도

대들보가 되는 것이다.

– 효림 스님의 ‘힘든 세상, 도나 닦지’ 중에서 –


회사에 입사한 후 2년만 다니고 그만두려 했던 사람이 20년을 넘게 다니면서 소위 인간이 되었다. 점점 사람과 어울려서 사는 법을 배웠다. 어느 날, 부서장들이 모인 회의에서 어쩌다 나이 얘기가 나와서 ‘저는 여자 나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40세입니다.‘라고 말했더니만 여기저기에서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라면서 웃으면서 많은 분들이 반발과 반박을 심하게 하셨다. 그럼에도 그건 나의 진짜 마음이었다.


[사람들과 부딪히며 모난 돌이 둥근 몽돌이 되다]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나이 사십이 되어서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의 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되어 어떠한 일에도 의혹되는 일이 없었다는 공자의 말로 불혹(不惑)은 나이 40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사십이라는 고개를 넘으면서 세상의 도리를 분명히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40세 전후가 가장 아름다운 나이라고 생각했고 나 또한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여겼다. 30대의 직장 여성은 남성 문화 가운데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과 일에 해내야 하는 성취 욕구,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고자 하는 자아 욕구가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뜨겁게 달궈져 있다. 때로는 용감한 전사처럼, 때로는 이기적인 공주처럼, 때로는 뾰족한 송곳처럼, 때로는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진 고아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균형 있는 아니, 균형을 잡아가는 삶이라기보다는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음에도 커리어 우먼이라는 멋진 아우라를 풍기면서 커다랗고 힘찬 좌충우돌 에너지의 움직임이 있는 시절이다. 사십이라는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뾰족한 돌이 둥글둥글한 돌이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다. 주상절벽과 같은 아름다움을 뽐내던 정점의 시점을 지나서 어느 날 절벽에서 뾰족한 돌멩이 하나가 바닷가로 떨어진다. 그 뾰족 돌멩이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자신의 의도에 관계없이 아침저녁으로 파도에 부딪치며, 차가운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모래에 쓸리고, 얼었다가 녹았다가를 반복하면서 덮치는 폭풍을 겪어내고,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모서리가 뭉뚝해지기 시작하다가 표면이 반들반들 해지면서 누군가의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갈 만한 둥근 몽돌, 보드라운 조약돌이 되어간다.


모난 돌이 서로 부딪히면서 둥근 몽돌이 되듯이 나 역시 모난 돌처럼 다른 의견을 주장하거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자주 부딪혔다.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고 부대끼는 삶은 고통스럽지만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준 깨우침의 스승이었다. 회사라는 공동체에서 함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생겼던 수많은 사람과의 얼룩과 스크래치가 내 삶을 다르게, 숙성되면서 살도록 만들어 준 원동력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 모든 과정에서의 달콤하고 씁쓸하며 맵고 짜고 시큼한 경험과 삶의 지식이 이제는 지혜가 되어 성숙함으로 드러난다. 책상에서 열심히 배워 터득한 지식도 현실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앎이 추가되고, 몸으로 겪어낸 상처 위에서 피어나는 지혜야 말로 불확실한 삶을 살아내는 아름다운 디딤돌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사십 고개를 넘어서 내 열정이 어디 갔는지 그 허전함을 메꾸고자 기억 속의 똑같은 열정을 찾아 헤매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30대의 뜨겁고 뾰족한 열정은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경주마처럼 바로 코앞의 목표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날 너무 지쳐서 목표를 잠시 내려놓았을 뿐인데 갑자기 그렇게 빛나고 뾰족했던 열정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사라져 버린듯하여 허전함을 느낀다. 낯설다. 찾아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아니다. 다만 그 존재의 모양이 바뀌었을 뿐이다. 고드름이 녹아서 물이 되면 고드름이 사라짐을 아쉬워하듯이, 고드름이 물로 된다고 해서 고드름이 품고 있는 물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젊어서 뿜어내던 열정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른 색깔로 본래 열정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꿈꾸는 돌멩이와 못생긴 나무의 40세 이후]


흙먼지가 날리고 비바람이 불어와

뼈 속까지 아픈데 난 이를 악문다

아등바등 거리는 나의 삶을 위해서

내 맘 둘 곳 찾아서 난 길을 떠난다

나는 자유로운 새처럼 마음껏 하늘을 날고 싶어

굴러 난 굴러간다

내 몸이 부서져 한줌의 흙이 돼도 굴러 난 굴러간다

내 사랑 찾아서 내 꿈을 찾아서

머뭇거릴 새 없이 모두 지나 버렸어

시간이라는 놈은 피도 눈물도 없어

구르고 또 굴러서 멍 투성이가 돼도

세상 끝에 홀로 서 당당히 선다

나는 돌멩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굴러가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

내 꿈을 찾아서 내 사랑 찾아서


2012년 마시따밴드가 발표한 ‘돌멩이’라는 노래의 가사의 일부이다. 돌멩이는 20대, 30대처럼 꿈과 사랑을 찾아서 이리저리 치이고 굴러가면서 세상을 경험하며 나의 꿈이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40대에 비로소 세상 끝에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당당히 서면서 동시에 세상이 어떠함을 알게 된다.

동광석이 1000도 이상의 용광로에서 세 번 살아남아야 순금이 되듯이 같은 열정이라도 40대의 열정은 다른 면모를 지닌다. 많은 불순물을 빼내어지는 단련의 시간 덕택에 조금 더 배려하고, 조금 더 포용하며 세상과 더 조화로운, 나와 함께 ‘우리’라는 사랑의 원소가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혼자 고군분투하며 싸우다가 문득 더불어 사는 삶의 필요를 느꼈을 때, 나와 똑같이 각자의 방식으로 삶에 대해 배우고 있으며, 나와 똑같이 슬픔과 외로움과 절망을 그들도 겪어 내었으며, 나와 똑같이 그들도 자기 삶에서 행복을 찾으며 잘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음을 보게 됨이리라.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든, 누구에서든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는 평생 학생의 자세를 몸으로 체득하여 알아버린 탓이리라. 그러니 기존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던 사람조차도 그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여 애쓰는 표현임이 이해되기 시작하고 가슴을 열어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됨 덕택이리라. 이렇게 자신의 꿈과 목표에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고 견뎌냄으로써 스스로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기다림이라는 숙성을 거쳐 결국에는 나의 삶에도 사랑이 필요하며, 자연스럽게 사랑이 전부이며, 이 모든 노력의 산출물을 이루어냄이 결국은 사랑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바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야기 했던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138쪽) 와 같이 매일 매일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삶으로 대답을 하면서 얻어진 바로 순금, 정금 같은 지혜이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길들여진 사랑의 지혜이다. 삶을 머리와 계획대로 살지 않고, 그저 가슴이 이끄는 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삶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에 순간순간 진심으로 대답하는 삶을 살 때, 그것이 현실과 상태와 결과에 상관없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살아내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성경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이 나온다. 온유(溫柔 프라에이스, praeis)란 말은 벌판을 질주하던 야생마를 훈련과 연단을 통해 전쟁이나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잘 길들여진 준마(駿馬)로 변하는 과정을 말한다. 야생마와 준마, 이 둘은 엄청나게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동일하다. 다만 야생마는 힘은 있으나 그 힘을 자기 뜻대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사람에겐 그 힘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지만 반대로 준마는 자신 안에 있는 엄청난 힘을 의도에 맞게 조절하여 사용하므로 그 힘의 가치는 야생마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렇게 온유는 출생 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훈련으로 생기는 아름다운 미덕이며, 단순하게 외적인 폭력, 잔인함의 반대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고, 또 그 고통을 인내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성숙함을 말한다. 이것이 40대의 아름다움이다. ‘정열적인 30대’가 통제할 수 없는 폭발하는 에너지를 선보이며 거친 벌판을 달리는 야생마였다면 ‘열정적인 40대’는 크고 원숙한 에너지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목표를 향해 자신만의 속도와 체계로 노력하면서 자기 삶을 반추하는 준마에 가깝다.


흐르는 물은 힘이 있다. 흐르는 물은 많은 것과 부딪히지만 감싸 안으면서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점점 더 깨끗해지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만나는 법을 배운다. 문요한 작가의 ‘고인 물은 모래 한 알 움직일 수 없고, 얕은 물은 종이배 하나 띄울 수 없습니다.’  라는 문구처럼 우리의 삶의 강물은 흘러야 한다. 흐르면서 경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깊숙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자. 그림자가 가장 길어질 때가 오히려 태양은 내게 가장 가깝게 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인생의 태양은 하루와 같아서 때로는 머리 위로 높게, 때로는 가장 낮게 뜨기도 한다. 또 그림자 길이는 계절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더구나 사람마다 인생의 계절은 모두 다르다.


성공을 위해서는 오랜 시간 시행착오와 노하우가 반드시 쌓여야만 한다. 그것이 인생의 또 다른 발견이며 기쁨이지 않겠는가. 한계와 경계에 대한 넘어섬의 경험 없이는 경지에 이르는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넘어서지 않고는 자기 자신의 한계는 물론 자신만의 기준이 되어버린 경험의 치명적인 약점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다. 살아간다는 의미는 지금 여기의 편안함에 머물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낯선 경계를 넘고 흘러서 다른 세상과 만나는 우발적인 마주침에 설레며 깨닫는 여정이다.

시행착오와 넘어짐을 위한 축적을 만들고, 그 축적을 통해 넘어서면 그 넘어섬의 순간에 찾아오는 자신만의 크고 작은 희열이 있다. 이렇게 희열의 순간이 많은 사람은 삶이라는 산을 끝까지 남아서 지키는 가장 못생긴 나무가 되며 가장 큰 고목나무임에 틀림없다. 설사 누군가에 의해 잘려지더라도 대들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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