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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쁨의 강물 Jun 07. 2022

#11. 불면증이라는 손님이 찾아왔다.

여인숙  <잘랄루딘 루미>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일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거나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회사에 입사해서 조직은 여러 차례 합쳐지고 분리되고를 거쳤지만 업무 기반의 뿌리가 흔들리진 않았다. 그런데 수석 승급 2년 전, 책임 7년차에 사업부가 통합되었다. 보통 승급 2년 전 시점은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의 성과가 반영된 고과 결과 뿐 아니라 성과에 대한 인정의 정점을 찍어놔야만 각 부서의 승급 비율에 따라 순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공통 업무는 먼저 통합되고 자리를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합된, 아니 느낌으로는 흡수된 사업부에는 그동안 내가 담당했던 업무는 여러 부서에서 흩어져 맡고 있어서 먼저 어느 부서로 이동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100명이 있는 파트에 우리 2명이 합류되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님에 감사했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바뀐 외부 상황에 그냥 가벼운 충격을 받았을 뿐이고, 시골 동네에서 유명하고 공부 잘하던 아이가 갑작스레 서울로 전학을 가서는 잠시 기운을 잃은 것처럼 허무함을 조금 느꼈을 뿐이라고 여겼다. 낱말 사전에 충격(衝擊)이란 슬픈 일이나 뜻밖의 사건 따위로 마음에 받은 심한 자극이나 영향이며, 허무(虛無)는 뜻이 없고 쓸쓸하여 마음이 텅 빈 느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충격적인 경험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허무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더욱 심각한 문제다. 낯선 맞닥뜨림이 점차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점차 다가올 때, 지금까지 공들인 노력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이 설상가상으로 더해지면 더욱 허무해진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괜찮지 않은 너에게’라는 부제목을 가진 『아임 낫 파인』이라는 책에서는 우울증에 빠지면 공통적으로 세 가지를 잃는다고 말한다.
첫째, 힘과 의욕이 없어진다. 둘째, 모든 것에 가치를 잃는다. 셋째, 희망이 없어진다.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무기력함),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고(무가치함),
앞으로 더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무망감) 생각한다(30쪽).
의욕이 상실되면 성장 동력을 상실하게 되고, 하는 일조차도 무가치하다고 판단하게 되면, 소중한 의미를 부여하며 애지중지하던 일에서도 손을 놓아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거기다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희망마저 보이지 않으면 끝을 모르는 어둠의 터널에 진입해서 극심한 혼돈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잃고 있었냐면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이제까지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공들여서 정성껏 쌓아놓은 반짝이는 아름다운 탑을 흡족하게 바라보는데 어디에선가 갑자기 사막 모래 돌풍이 훅 불어와서는 반짝이는 탑을 모래 먼지로 덮어버린 허무함이 엄습하였을 뿐이다. 공들여 쌓은 탑은 보이지 않고 대신 그 위에 쌓인 모래 언덕이 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감춰버려서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구의 관심도 끌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모두들 지금 새롭게 만들고 있는 탑에만 정신이 쏠려있으니 당연했다. 나는 다시 어디에 가치의 터전을 두고, 어디에서부터 다시 쌓아가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리저리 사방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리며 찾거나 손으로 발로 두드려 보고 있었다. 


설계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비교하여 통합 준비를 해서 추진하고, 좀 더 효율적인 개선 방안을 제안했다. 거기까지였다. 밤늦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몰입해서 새로운 판을 짜고 혁신을 주도하던 업무를 하던 사람에게 작은 일부분을 개선하고 통합하는 일은 흥미롭지 못했다. 갑자기 업무 시간도 한가해졌고, 회의도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참여한 회의에서는 거의 의견을 낼 필요도 없었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칼퇴를 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너무도 친절하게, 어쩌면 너무도 깍듯하게 잘 대해줬으며, 웃으면서 평화롭게 잘 지내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괜찮았다. 그리고 잘 지내고 있노라고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평생 눕기만 하면 잠들었던 나에게도 불면증이라는 손님이 찾아왔다.


[살아야 해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불면증이라는 걸 모르던 사람이 잠을 못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갑자기 무언가 모를 화가 불쑥 올라오기도 했고, 가슴은 밤고구마를 먹고 물 마시기 직전처럼 꽉 막혀서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공기가 최대로 들어간 빵빵한 풍선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서 어디 공기를 뺄 작은 구멍은 없나 하고 정신없이 작은 숨구멍 하나라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느 날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걷고 싶은데 길거리를 걸을 수는 없으니, 토요일 아침 일찍 혼자 가벼운 가방을 메고는 가까운 오산대역 물향기 수목원을 걷고 걷고 또 몇시간을 걸었다가는 집에 오기도 했었다.


‘성공의 반은, 죽을지 모른다는 긴박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비롯되며 실패의 반은, 잘 나가던 때의 지나간 향수에서 비롯된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나는 실패와 성공의 중간 지점의 시소 위에서 두 발로 어떻게든 마음의 중심을 잡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먼저는 ‘어떻게 하면 잠을 잘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몸을 좀 혹사시켜 보면 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수영장에 등록했다. 10년 전에 겨우 호흡과 발차기만 몇 주 하다가 온 몸에 소독약 두드러기가 나서 그만두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수영이다. 나의 목표는 수영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다이어트도 아니고, 그냥 잠을 잘 자는 거였다. 그래서 무조건 하루에 매일 두 시간씩 열심히 했다. 

킥판을 가지고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로봇처럼 발차기와 호흡을 혼자서 연습하고 있노라면 자꾸만 사람들이 와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거나, 심지어는 수영 강사가 와서 가르쳐주기도 했다. 잘못된 방법으로 매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안쓰러웠나 보다. 덕분에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운동량도 있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수영 강습은 저녁 9시였는데 호흡 연습을 하다가 수영장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트림을 하면 소독약 냄새가 올라올 정도로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했다. 기존에는 퇴근해서 11시에 집에 도착하면 밤마다 양푼을 끌어안고 먹었는데 이제는 너무 물을 많이 먹어서 야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일 수영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해서 어느 순간 킥판 없이 자유형을 하고 배영을 배우게 되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혼자 천천히 앞으로 물살을 가르며 쭈욱 미끄러져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과 발차기 할 때마다 첨벙 첨벙 들리는 물소리의 울림이 싱잉볼 소리처럼 참 좋았다. 주말 오전에는 아침 해가 창문으로 10층에 위치한 수영장 안을 비출 때면 물 위에서 햇살이 빛났다. 레인 하나를 혼자 점령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한가로움과 평화와 공간의 여유를 모두 가지고 즐기는 듯해서 좋았다. 

다른 운동과 달리 수영복에 수모에, 수경까지 쓴 모습은 자주 보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웠으며 물속에서 수영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걸 수도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레인 끝에서 잠깐씩 서 있기도 했지만 그 시간을 짧았고 출발하면 그만이었다. 물속에서 온전히 나 혼자만 있는 동안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쓸 데 없는 생각을 반복하기 어려웠다.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어김없이 호흡 타이밍을 놓쳐서 꼬르륵 물을 먹었다.  생각이 몸을 지배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던 몸을, 몸을 먼저 움직여서 꼬리 물던 생각의 꼬리를 잘라버리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때때로 자주 울기도 했다. 물속에서는 우는 것도 자유로웠다. 내가 우는지 아무도 몰랐고 눈물인지 수영장 물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멈추지는 않았다. 그런데 경기는 중단되었다]


그렇게 수영을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 강사님이 6개월이면 한번쯤 나가볼만 하다면서대회를 나가 보겠느냐고 했다. 완영에 목표를 둔 대회는 연습하면서 실력 향상도 된다는 말에, 또 바로 옆 레인에 있던 상급반 많은 분들이 참가한다기에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수영 스타트도, 턴도 배운 적이 없었다. 아니 배울 단계가 아직 아니었다. 여자였지만 유연성도 없고 힘으로만 수영했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로봇 수영이라거나 각기 춤을 추는 것 같다면서 놀렸지만 그건 뭐 그러려니 했다. 대회 한 달 전부터 턴과 스타트를 배우고 수업이 끝나면 1시간씩 발차기,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 등 소위 뺑뺑이라는 걸 시작했다. 

상급반 분들을 따라서 20분 정도 뺑뺑이를 하고 나면, 피가 얼굴에 몰려서 새까매지고 정점을 지나면 다시 혈색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꼴찌인데도 다시 한 바퀴 돌고 온 1번이 내 뒤를 뒤따라오니까 무슨 고양이에게 내몰리는 쥐새끼 마냥 앞으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니 확실히 체력도 좋아지고 실력도 느는 게 보였다. 문제는 스타트였다. 자유형 스타트를 먼저 배웠는데 물속에 쏙 들어가는 대신 배치기를 하다 보니 5부 수영복을 입었음에도 허벅지부터 배까지 전체가 짙은 보라색으로 시커멓게 물들었다. 혹시나 남편에게 들킬까 싶어서 옷도 불을 끄고 갈아입으면서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의 출전 종목은 배영, 물속에서 출발하니 그나마 수경이 벗겨질 확률도 확실히 적어 초보로서는 나름 안전한 선택이었다. 뭐든지 시도하다보면 기존과 다른 자신만의 방법을 몸으로 알게 된다. 시작하기도 전에 갖가지 구상을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해도 일단 격전의 현장으로 몸을 던지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시시각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도는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경험을 통해서만이 진짜 실력이 쌓임을 배웠다.


그렇게 수영 입문 6개월이 갓 넘어 수원시장배 수영 대회에 출전했다. 8개 레인 중에서 가운데 레인이다. 심장 박동은 두 배로 빨라지고, 긴장으로 종아리는 쥐가 날 것 같은데 출발 신호와 함께 경기는 시작되었다. 심장은 빨리 뛰고 마음이 급하니 발차기도 많이만 차고 제대로 물을 차주지 못했고, 팔 돌리는 속도도 너무 빠르니 팔을 끝까지 펴고 어깨로 밀어주지 못했다. 동작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당연히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안 나고 물은 계속 얼굴을 덮쳐서 숨쉬기는 어려워 져서 허우적거렸다. 팔다리의 움직임은 두 배로 많았지만 앞으로 쭉쭉 못 나가니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나 왕초보 선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힘은 그만 소진되어 버렸다. 그렇게 어디가 끝인 줄도 모르고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버티자 끝까지만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50미터 끝자락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터치를 했다. 정말 길고도 긴 50초였다. 


그런데 내가 5번 레인이라서 양끝으로 수영을 해서 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 다음 조가 출발을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나에게는 수영해서 나갈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서 옆으로 이동할 힘이 없어서 레인에 그냥 매달려 있었다. 그랬더니 우리 수영장 사람들이 달려와서는 나를 물속으로부터 위로 두 팔을 잡아당겨 구조를 해줬어야만 했다. 나로 인해 몇 초간 경기가 중단되었다. 땅바닥으로 올라온 나는 그야말로 대자로 뻗어서 떡실신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 얘기를 하면서 한바탕 웃는다. 그리고 난 아직도 이때의 영상을 차마 보질 못했다. 그런데, 대회 당일에 미리 오셔서 준비 운동도 안하시고 그 전날 약주하셨다면서 느릿느릿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는 대회에 참가해서 거뜬하게 1등을 차지하시는 60대 반장님의 여유를 보았다. 대회의 기록은 평소 매일의 절대적인 연습량에 따라 달라지며, 대회 참가 기록은 연습할 때 보여준 평균 기록이하라는 것을 몸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좋은 기록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록은 오로지 내 몸이 흘린 땀의 양에 비례한다. 어쩌다 얻는 우연한 좋은 기록도 있겠지만 그런 기록은 반복해서 나오지 않는다.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몸에 밴 무의식적인 습관의 능력이 내 몸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적인 연습만이 기록의 반전을 가져올 수 있다.


무엇이든 잘하지는 못해도 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매일 계속하는 반복의 힘이 있다면, 분명히 삶의 어떤 부분이 연마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삶에서 새롭게 다가올 기회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기다림이며 믿음과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구본형의 『깊은 인생』에 “그러니 매일 걸어라. 매일의 힘만이 꿈으로 인도하는 단 하나의 믿음직한 주술이다. 명심하라. 평범한 자가 비범한 자를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분야를 정하고 들이파는 것이다”(121쪽) 라는 구절이 나온다. 매일 반복한 연습의 힘은 무엇이든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며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원동력이 된다. 어떤 것이든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된다. 연습은 어떤 경험을 낳고, 그 경험은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자신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기는지, 이길 수 있는지를 알도록 가르쳐 준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 8명의 선수 중에서 5위로 들어온 생애 첫 번째 떡 실신 배영 경기는 보이지 않는 삶에서 투명한 나만의 얇은 벽을 하나씩 하나씩 걷어내도록 도와주었다. 그동안 질 것 같은 경기는 아예 시작하지 않고 피하려고만 했던 회피, 시작한 경기는 어떻게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감, 예상 밖의 결과나 실패에 대한 좌절감, 그래서 무엇이든 과정의 즐거움은 항상 접어두고 결과로만 전체의 어떠함을 가볍게 치부해 버리면서 과정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성과주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잘하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하다는 거만함, 나 스스로를 돌보고 관심 갖기 보다는 때로는 중요하지도 않은 타인의 반응에 쓸데없이 과도하게 신경 쓰는 평판 등의 투명한 벽을 가진 미성숙한 사람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씩 배우기 시작하는 도미노의 첫 번째가 되었다. 


‘나는 책을 읽어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이야.’ 라는 고정 관념을 버리고 꾸준히 수영, 헬스, 필라테스를 하면서 체력을 길러 보기로 했다. 몸을 움직이는 시간이 일정해짐에 따라 마음의 힘도 안정되고 힘이 생겼다. 몸과 자세를 먼저 바로 잡거나 바르게 하면, 마음이 곧아지고 바로 선다. 마음을 다 잡으면 자연스럽게 몸의 자세가 곧아진다. 그러면서 내 삶에서 어떤 것이든 수용하고 허용하기로 했다. 아니 수용하고 허용하고 싶었다. 나는 언제든지 이길 수 있으며, 또 나는 언제든지 질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게으름, 나태, 권태, 짜증, 우울, 분노. 모두 체력이 버티지 못해 정신이 몸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증상이야. 네가 후반에 종종 무너지는 이유, 충격을 입은 후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귀가 더딘 이유,  모두 체력의 한계 때문이다.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충분한 고민을 버텨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 이란 외피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 돼.” 

윤태호의 『미생』 4권에 나오는 장그래의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다. 


지금 마음의 안팎을 살펴보고, 나의 삶이라는 흐르는 강물에서 만나는 새로운 손님을 잠시만 생각해보자. 선뜻 맞는 손님도 있고, 머뭇거리거나 밀쳐내고 싶은 손님도 있겠다. 어떤 상황과 이유에서든 내가 받아들이고 맞아들인 손님은 단지 그 순간 내가 알아보지 못해서 간과했을지라도 나의 삶속에 깊이 들어와 나를 흔들어 깨우는 어떤 메시지이며 메신저임에 틀림없다. 어떤 손님이든 기꺼이 초대하고 맞아들이며 환영하고 감사하게 여기면, 어느 덧 움츠렸던 나의 몸과 마음은 저절로 삶 속에서 활력을 되찾게 된다. 


물의 흐름을 타지 않는다면 내 방식과 속도로 아무리 안간힘을 써서 허우적댄다 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물속으로 더 깊이 빠져 들거나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한다. 오직 나만 녹초가 된다. 지금 나의 삶에서 앞과 뒤, 옆으로 어떤 강물이 흘러가고 있는지 그대로 느껴보자. 흐르는 강물과 싸워서 이기려 하지도 밀쳐내지도 말고 그저 나를 가만히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자. 물 위에 가만히 힘을 빼고 있으면 저절로 몸이 뜨는 것처럼 나의 삶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도 그대로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자. 나를 지나갈 때 충분히 나를 내어주고 경험하여 삶의 속도대로 흘러가도록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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