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쁨의 강물 May 05. 2022

#4. 입사 3년 차의 혼란 : 실망과 그림자(1)

流水之爲物也(유수 지위 물야) 不盈科不行(불영과 불행)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 《맹자(孟子)》 진심 장구상(盡心章句上) 제24장 -


[ 과정의 아름다움이 결과의 아름다움을 보장한다 ]

물이 흐르다가 웅덩이(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모두 채운 후에야 비로소 다시 흘러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결코 그 구덩이를 건너뛰고 흐를 수는 없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마주치는 것들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어떤 결과를 얻거나 종착점에 다다른다. 때로는 단계를 건너뛰고 싶고, 겪어내고 싶지 않은 수많은 일들이 있지만 반드시 과(科), 과정을 지나가야 한다. 논어에 진선진미(盡善盡美)라는 말이 나온다. 한 사람이 이룬 성취결과가 비록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과정이 결코 선하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를 지닐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미(美)는 이룬 결과를 말하고 선(善)은 결과에 관여된 동기와 과정을 말한다. 진선진미는 한 마디로 선(善)이 없는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과정의 아름다움 없이 결과의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신영복의 『처음처럼』 에는 진선진미에 대한 다른 해석도 나온다. “목표의 올바름을 善(선)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美(미)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라 합니다”  


물은 흘러야만 하고, 흘러가는 물의 입장에서 구덩이를 채우는 시간은 정지되어 있고 도태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이 웅덩이를 채우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비록 상황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마땅히 거쳐야만 하는 과정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바로 내가 어떤 태도를 선택하기로 결정하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어떻게 보낼 것인지, 어떤 노력을 그동안 할 것인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서 인내할 것인지,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지, 채움의 시간 동안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지, 감사와 불평 중에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보낼 것인지 말이다. 똑같은 시간을 보내도 누군가는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난국을 돌파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부정적인 자세와 태도로 주어진 상황을 탓하고 비난과 질책을 하며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기도 한다.


[ 같은 해 입사한 나랑 다른 남자 사원이 있었다 ]

그는 자리부터 달랐다. 파티션 안에서 나는 박 과장님과 등을 맞대는 대각선 자리였는데, 그는 박 과장님 바로 옆이었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주구장창 앉아서 업무 고객인 개발실 연구원들과 통화하고 일을 처리하기에 바쁜 나와는 달랐다. 그는 일하는 틈틈이 박 과장님이 담배를 피우러 가면 그냥 슬며시 따라갔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박 과장님께 살갑게 눈웃음 지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기도 하고, 농담도 많이 했다. 또 다른 두 명의 남자 대리와 나, 이렇게 우리 세 사람에게는 어찌나 수시로 잘난 척을 하는지, 재수 없는 말을 하기도, 가끔씩 찬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러나, 박 과장님 앞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순한 양과 같았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은근슬쩍 자신의 유능함과 더불어 박 과장님의 뛰어난 점, 칭찬을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박 과장님을 제외한 우리들만의 회식에는 꼬박꼬박 참여했다. 당시에는 도대체 분명하지 않은 그의 캐릭터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몇 개월 뒤에 신입사원 하계 수련 대회 지도 선배로 참가하기도 했고, T/O가 얼마 없는 유료 교육에도 다녀왔고, 상위 고과 평가도 받았다.


그가 무엇을 잘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못하는지 몰랐다. 진짜로 정말 몰라서 잘한다 못한다는 판단뿐 아니라 박쥐마냥 뭐 하는 거냐며 비난하지도 못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모두 챙겨가는 것을 부러워할 줄도 몰랐다. 사회생활의 일자무식, 무식쟁이, 까막눈 같았다. 까막눈은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르거나 그런 사람을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그렇다. 배우지 못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서 배웠지? 그리고 나중에서야 대부분의 남자 사원들은 이런 것을 군대에서 배운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군대 다녀온 사람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군대는 원하지 않는 단체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규율과 행동 원칙을 몸으로 배우면서 나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깨닫는 곳이라고 한다. 반복되는 규칙적인 생활, 선후배 간의 엄격한 규율, 개인적 선호도보다 집단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단체 생활의 어려움, 공동의 노력을 통해 달성해야 될 목표가 존재하는 군대는 조직생활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일맥상통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특히 일일이 가르쳐서 배우기보다 오랜 단체 생활을 통해 몸으로 느끼는 직감적 눈치 보기는 군대 생활의 어쩔 수 없는 묘미 중의 묘미라고 했다. 


그렇게 읽게 된 신입 사원들의 필독서로 불리는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문지기를 따돌리면 그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상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라. 상사는 내가 조직에서 위로 올라가기 위한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다. 문지기와 친해져야 문을 열 수 있다. 당신의 직장 생활에 다른 누구보다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의 지지가 없으면 당신은 인정받지 못하고, 승진도 어려우며, 일자리까지 잃을 수도 있다.”(60쪽). 

문지기의 허락 없이 낯선 관문으로 입장할 수 없다. 내가 꿈꾸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입문과정의 열쇠를 쥐고 있는 문지기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지기에게 무조건 나를 알아달라고 아부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주는 문지기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격려해줄 때, 나는 더 큰 세계 속에서 이전과 다른 배움을 통해 또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문지기랑 하루 종일 말 한마디도 안 하면서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고, 나에게도 언젠가는 희망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일만 성실하게 잘 해내면 그 문은 그냥 자연스럽게 열리거나 열려라 참깨처럼 어느 날 갑자기 열리리라고 착각했다. 상사는 하나님처럼 나를 아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3. 옆집 남자도 살아봐야 압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