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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쁨의 강물 May 15. 2022

#5. 싸가지 없지만 일은 잘하는 여자 대리

어떤 길을 선택하든 진정한 길인지 알려면 그 길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는지 보면 된다. 유일한 출구는 그 길을 통과하는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아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 캐럴 피어슨, 나는 나 (45쪽) - 


사람에 따라서 어떤 일의 안정적 궤도에 오를 때까지의 속도는 약간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첫 발은 빠르고 센스 있게 내딛지만 그냥 거기 그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부스트 업이 느려서 업무 초반에는 느리고 능력 없어 보이지만 일단 자기 궤도에 오르면 그 다음부터는 2차 함수 그래프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결과가 분명하게 예측되지 않으면 시작 자체를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초기 셋업을 잘 하는 사람, 셋업 기반에서 빌드 업을 잘하는 사람, 지속적으로 안정적 운영을 잘하는 사람 등이 다르다. 각자가 업무를 진행할 때 선호하는 방식은 자신의 가치관은 물론 일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다양한 업무 추진 방식만큼이나 그 일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으려는 결과, 업무 성과, 성취감 또한 다르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업무 진행 방식이나 결과를 단순히 한 가지 잣대로만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자체가 매우 위험함을 내포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보다 3학년 때 성적이 좋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보다 3학년 때 성적이 좋았던 학생이 나였다. 그렇다면 내가 대략 어느 유형의 사람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아주 초반에는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일을 해서 어떤 결과를 이루어낼 것인지 머리에 확실히 그려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 일의 목표와 방향이 명확해지면 눈가리개를 하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그저 달린다. 목표가 분명하고 전략이 어느 정도 수립된 후에는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니까 처음 나를 겪어 본 사람들은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데 초반에 진행이 느리고 변화가 없다며 답답해 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일부분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다. 한 두 번의 일하는 방식을 보고 업무 능력이나 일에 관한 자세와 태도를 평가할 경우에는 오판과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류시화 시인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에세이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무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한 계절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무와 사람은 모든 계절을 겪은 후에야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계절만으로 인생을 판단해선 안 된다. 한 계절의 고통으로 나머지 계절들이 가져다줄 기쁨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겨울만 겪어보고 포기하면 봄의 약속도, 여름의 아름다움도, 가을의 결실도 놓칠 것이다.” (183쪽) 


회사의 업무도 같았다. 기존의 업무와 시스템 등을 개선하고 새로운 프로세스를 도입하는 혁신 업무를 하다 보니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소위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합리적이기도 했으나 현재의 편리함을 유지하려는 관성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가 많았다. 이런 불합리한 반대, 때로는 폐쇄 정책과 같은 아집에는 친절한 대응과 회유의 단계를 넘어선 순간, 비록 직급이 부장일지라도 소리를 높여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의 주장을 메일로, 많은 사람들이 듣게 되는 사무실에서도 거침없이 표현했다. 그 당시 나는 싸가지 없지만 일은 잘하는 여자 대리였다. 그분들은 나를 ‘추진력이 참 좋다’라고 미화해서 표현했었다. 함께 일했던 대리가 당시 사업부에서 악명이 높았던 직속 상사에게 ‘왜 남 대리에게는 다른 사람처럼 일에 간섭을 하지 않느냐?’고 했을 때도 ‘쟤는 자기 일은 잘하잖아.’ 그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렇게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전사와 같았다. 자신의 맡은 일에 자부심, 오너십, 열정으로 회사의 발전과 성공적으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갈등은 때때로 발생할 수 있으며 대의를 위해서는 더러운 성격이 정당하게 표현되어야 하므로 개인적인 소의는 희생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위한 업무를 잘 추진하여 성과를 이루어낸다면 나의 이런 충성심을 회사는 당연히 알아주게 되고, 자동으로 고과 평가도 잘 받게 되어 진급도 순탄하게 될 줄로 착각했다. 


[ 바닥은,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


회사를 5년이나 넘게 다녔음에도 세상에 회사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는 일명 회사 정치 문외한이었다. 어떤 부족에게 그 언어가 없으면 실체도 없다는 것처럼, 인식이 없었기에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일 조차도 보이지도 않았고 보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사에는 제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권력의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으며, 그 사다리를 찾아내거나 구해서 올라간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이룬 뒤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똑같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그 사다리를 슬며시 발로 밀어서 차버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건 자체로 충격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0년이 넘는 세월을 안경에 의지해서 살았던 내가 라식 수술을 한 직후 ‘수술 끝났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수술대에서 일어나서 신발을 신으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이제는 안경이 없어도 또렷이 주변을 볼 수 있었던 순간은 그냥 예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렇게 미로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고, 부딪히면 다른 길을 찾고 바지런히 쉴 새 없이 제 몸을 움직이며 벽에 부딪치면서 성실하고 충성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쥐가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렇게 성실하고 순진한 쥐가 어느 날엔가 우연히 미로의 한쪽 문이 살짝 열리고 다른 쥐가 그곳으로 쏘옥 들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성실하고 열심히 움직이는 것에 전력을 쏟았던 쥐는 갑자기 황당하고 허무를 느끼게 된다. 그동안 몰랐던 다른 이면의 힘에 의해서 조직과 자신이 조정되었음을 알게 된다면 과거의 모습은 그저 바람에 흘러가는 연기와 같이 허망함에 마음이 무너지게 된다. 마치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에서 배후의 조작된 진실을 알게 됨과 같다.


안타깝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단지 전에 보지 못했던 상황이 눈에 들어오고, 소식이 전해졌을 뿐이고 나는 여전히 나의 일을 해야만 했다. 줄을 잘 서야 한다던데, ‘하하하’ 내가 줄을 설 수 있는 조건을 가지지 못했다. 더구나 나는 어떤 줄에 서더라도 눈에 금방 잘 띄는 ‘여자’라는 성별을 가지고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도 나를 자신의 권력의 줄 끝에 세워주지도 않았으며, 어느 줄을 서라고 정보를 알려주지도,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지도, 빈 말이라도 권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과 관계와 권력의 삼각 구조 속에서 나만의 사다리를 어디서 직접 구하거나 만들어야만 했다. 그 길 밖에 없었다. 이렇게 바닥은 그냥 딛고 일어서는 마지막 보루였다. 바닥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바닥을 치고는 심기일전하여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바닥에 대하여’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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