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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쁨의 강물 May 22. 2022

#6.책임2년차, 나를 성장시키려고 애쓰고 애쓰다-2

[일을 통한 자아실현은 거짓말이다, 바로 그 말이 거짓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어느 순간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찾기만 한다면 매일 행복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출근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는다. 거기다가 멋진 사람들과 활발하게 협업하면서 개인의 성장과 조직의 성과에 기여함으로 자연스럽게 더 나은 사회 만들기에 일조할 것을 머릿속에 그린다. 이런 꿈을 꾸는 대부분 직장인의 첫 번째 실질적인 발걸음은 바로 입사하자마자 선택하는 부서이다. 누구나처럼 일을 통해 자신의 포부와 꿈을 실현하려고 최대한 전공을 살리려 하고, 여러 정보를 수집하면서 누군가 좋다고 했거나 적성이라 여겼던 관심분야 업무를 심사숙고 끝에 1순위부터 5순위까지 지원한다. 그룹 연수 중 사업부를 선택할 때 나도 그랬다. 아무리 작은 것도 기도해서 결정하던 신실함이 유별난 그 시절에는 혼자 고민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공중전화에 줄을 서서 통화하면서 목사님, 엄마, 지금의 남편, 나 이렇게 네 사람의 각자 기도 응답으로 얻은 순위를 모두 확인하였다. 신기하게도 모든 순위가 일치하였다. 최선이며 최고의 선택이었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직업은 자아실현의 장이라고 배웠다. 실제로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서 3단원 ‘사회와 윤리’에서 나오는 직업의 기능은 생계유지, 자아실현, 사회참여이다. 특히, 자아실현은 개인의 잠재적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여 성취감과 보람을 얻으므로 자아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적혀 있다. 이러한 직업을 동양적 장인 정신의 관점으로 본다면,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전념하거나 한 가지 기술에 정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라고 해석이 된다.

1950년 경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H. Measlow)가 인간의 욕구를 단계로 구분한 이론에 따르면 가장 상위 욕구가 바로 성장과 관련된 자신을 계속 성장 발전하게 하고자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자아실현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한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을 자아실현으로 보았다.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입사 초기에 부서와 업무의 결정에 깊은 고민과 많은 면담으로 애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 배치를 받고 실제로 업무를 하게 되면 바쁘게 진행되는 여러 업무에 파묻혀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뜩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업무가 맞나?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이 이거였나?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한 건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힘든 고3을 지나 대학 1학년 1학기 중반이 넘어가면 M.T(Membership Training)와 동아리 활동, 축제를 지나면서 ‘이것을 위해서 내가 고생하며 공부를 했던 건가? 내가 원하는 대학 생활이 이게 맞아?’ 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던 데자뷔(déjà vu) 현상이 일어난다. 데자뷔 란, 처음 보는 사물이나 현상이 마치 언젠가, 이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기시감(旣視感)을 말한다. 사실 이렇게 던졌던 질문은 처음이지만 이미 과거에 스스로 던져봤던 질문인 것처럼 느껴지는 질문이다. 질문의 답을 찾는 동안에는 누구나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지켜내려는 자기 합리화 작업을 거치게 된다. 마치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 나오는 주인공 노총각 M처럼 공통점을 찾고 찾아서 억지로 연결을 짓는다.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여 결국 설득당하면 그제야 제자리를 찾은 듯 안심을 한다.


흔히들 퇴사의 주기라고 하는 3년, 5년, 7년이라는 세월 동안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하면서 익숙해진 시간을 떠나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도 지루했다. 지루함이 어떻게 드러났냐면 출근시간을 거의 딱 정시에 맞추거나 5분에서 10분 늦기도 자주 했으며, 정시에 퇴근하고 싶어서 미리 가방을 챙기거나 주섬주섬 퇴근 준비를 할 정도였었다. 이런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같은 일을 반복해서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죽어라고 싫어한다는 것을. 컵에 물을 계속 부으면 어느 순간 컵 안에 물이 고여 있지 않고 흘러넘치는 것처럼 새로운 업무를 기획하고 혁신하며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발견했다. 비록 어려워 보이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기획하고, 통합하여 전략을 수립하고, 업무를 셋업하고 추진하면서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함께 성과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정말로 재밌고 즐겁다는 것을.


이러한 재미를 혀끝으로 겨우 살짝 알게 될 즈음에 조직 개편으로 그룹장님이 바뀌었다. 이때가 마침 하이퍼포머 책을 읽고 나서 ‘내 일만 제대로 잘하면 그걸로 충분해.’라는 생각으로 우렁 각시처럼 숨어 있다가 ‘나의 업무를 어떻게 성과로 표현하는 게 좋을까?’와 ‘도대체 나의 업무의 성과는 무엇일까?’로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업무 성과를 고민하며 다른 일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할 즈음이었기에 나만의 작은 시도이며 모험이고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메일을 보낼 때 업무에 직접적 연관이 있는 단 한두 명만을 수신처로 지정했다면 이제는 업무 진행 현황을 알게 되면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들을 참조처로 넣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결정한 나만의 도전이었다. 간단하게 메일 수신처만 변경하는 이 작은 행동은 ‘보내기’ 버튼을 마우스로 딸깍하고 손가락으로 클릭하기 전까지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마음속에서 엄청 서로 싸워댔다.  

‘뭐야 이렇게 작고 사소한 업무 관련 내용을 여러 사람들과 그룹장님까지 참조로 지정해도 되는 거야? 그건 너무 바쁜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시간을 뺏는 거 아냐? 다른 사람들이 쟤는 자기 업무를 스팸 메일처럼 왜 이리 많이 보내는 거야? 지금 자기가 일 많이 한다고 꼭 저런 방식으로 티를 내야 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지? 아, 나는 이런 정치적 오해를 받는 것이 싫은 데 말이지. 아니야 메일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더라도 대강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연관된 업무 결정에 도움이 될 거야. 업무 진행 내용을 전혀 모르는 것보다는 필요시에 찾아볼 수 있도록 정보를 주는 것이 나쁘진 않지. 나는 부하직원이고 상사에게 진행 현황을 공유할 책임이 있는데 이제까지 내가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이지. 이제부터는 그냥 나의 할 일을 하는 거잖아. 그래, 나는 일단 메일을 보내고 개봉 이든, 미개봉 이든 그건 그 사람의 몫에 맡기기 나는 그냥 나의 할 일에만 집중하고 일을 해보자.’ 여러 목소리 중에서 보내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런던 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 사회인류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관료제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불평등한 노동의 위계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해석 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들―특히 오랜 친구관계나 오랜 적대관계, 어느 쪽이든 지속적인 관계들―은 역사와 의미로 가득 찬 극단적으로 복잡한 것이다.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지속적이고, 때로는 미묘한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세상을 타인들의 관점으로 보려는 부단한 시도도 필요할 것이다. 내가 앞서 ‘해석 노동’이라고 일컬었던 것이 바로 이것”(108쪽)이다. 예를 들면 가부장제가 지배적이었던 시기일수록 남성은 여성의 삶을 상상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 반대는 아니라고 한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관점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떻게 보일까를 늘 상상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남성에 대한 상상력을 강요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폭력(violence)이다. 소득이나 자원이 일방적으로 남성에게 집중되었던 가부장제 사회는 남성이 여성의 상상력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폭력적인 관료제다. 여성은 남성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석해내는 데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상상력은 본래 시작부터 어떤 제한 조건이나 방해되는 장애물 없이 자유로워야 하지만, 출발부터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의 위치를 상상해야 한다면 불평등한 것이다. 남녀 간의 불평등한 관계가 상상력도 불평등하게 일어나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을 제공함에 따라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 많을 수밖에 없다. 여자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남자들이 습관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자를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는 일상에서 남자의 눈치를 늘 살펴야 하는 위치 (imaginative displacement)에서 원하지 않는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살아온 것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상상력을 ‘해석 노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성원은 상사가 또는 동료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업무 처리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공중을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걱정하는 시간을 보낸다.


이런 해석 노동을 심하게 하다가도 하루에도 수십 개 쓰는 업무 메일의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마다 어렵게 어렵게 결심하여 어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해당 업무 관련자들을 수신, 참조로 넣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을 수신처로 지정하게 되니, 메일의 본문 내용도 더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쓰게 되었고 업무 계획 일정도 더 잘 지키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가 업무의 우선순위, 진척사항이 정리되었다. 또 어떤 일을 마치고 완료했다는 메일을 보내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누가 메일을 개봉했는지 미개봉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결정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그동안의 이력이 이미 메일로 공유되어서 담당자 간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용이했다. 일을 처리하는 재미가 생겼다. 다른 파트의 업무를 돕거나 함께 진행하면서 일과 사람에 변화가 생기는 것도 재미있었다. 작은 시도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큰 기쁨과 보람을 안겨준 하나의 결정이었다. 작은 행동의 결정이 직장생활에서 어느 구역에 있는 도미노의 첫 번째와 같은 역할로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켜 주었다.


하물며 퇴사한 동료가 했던 부서의 재물 자산관리도 내가 맡았다. 서로 피하고 싶은 업무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그냥 내가 했다. 가까운 동료들은 그 직급에 무슨 그런 업무까지 하냐며 빨리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고 했었다. 부서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책상 서랍에, 보관함에, 회의실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모니터와 PC, 저장매체, 개발 시료, 전자칠판 등의 위치와 모든 상태 정보를 나중에 어떤 담당자가 맡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엑셀로 정리해 놓았다. 실물 자산의 바코드를 체크하면서 업무 연관성이 없어서 평소에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던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도 좋았다. 항상 좋았냐?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런 작고 하찮은 부서 업무를 하는 나를 고마워하기보다는 지금 바빠 죽겠다며 귀찮아하거나 무시하는 말투로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게 주어진 작은 일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여 소중하게 여기며 더 좋은 결과를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설명하고, 의견을 반영하고, 조율하면서 함께 결과로 만들어내는 일의 재미에 점점 빠져 들어갔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보다는 똑같은 일을 해도 ‘내가 하면 다르다’는 스스로의 자부심을 지켜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하찮게 여겨서 묵묵히 혼자 했던 업무가 어느 순간 보석 같이 빛나기도 했고, 또 잔챙이 같았던 짧은 T/F 업무나 잠깐의 필요를 채우던 아르바이트 업무가 강한 폭풍우 같은 상황의 변화에도 버틸 수 있는 수많은 잔뿌리처럼 나를 지켜준다는 것을 알았다. 반면에 나를 언제까지나 지켜줄 것 같았던 큰 고목 같은 업무가 비즈니스 환경이 바뀜에 따라 한순간에 힘이 빠져서 쪼그라드는 것도 경험했다. 그냥 생각으로 먼저 재거나 걱정하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지만 전혀 모르던 일도 일단 시작하면 그 일속에서 놀라운 깨달음과 과정에서 경험으로 얻는 지혜를 얻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업무를 통해 자아실현, 만족감, 존재감을 드러내고 일하는 기쁨을 알아가면서 개인과 조직에서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먼저 자신의 강점과 기질에 맞는 업무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열정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하나가 더 필요하다면 그것은 적절한 비즈니스 목표 환경에서의 나와 맞는 상사라는 타이밍이다. 강점, 업무, 조직 이 세 가지가 서로 균형을 이룰 때 개인의 자아실현은 꽃을 피우게 된다. 이것은 행운이고 은혜이다. 그러나 이 모두를 키워내며 밑받침하는 흙이면서 뿌리는 바로 그 사람의 태도이다. 기회는 내가, 바로 나의 태도가 만드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일을 하며 얻게 되는 모든 행운은 내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진행 중인 ~ing 프로젝트인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에는 ‘유월절 전에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 했던 열두 제자 중에서 유대인에게 은전 삼십에 팔아넘겼던 가룟 유다조차도 끝까지 사랑하셨던 그분이시다. 그러나, 정작 유다 자신은 죄책감에 스스로를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는 자신을, 자신이 먼저 포기해 버렸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과 온 우주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응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나를, 나의 태도를, 나의 자부심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나와 연관된 그 어떤 사람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설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포기한다 할지라도 내가 나 스스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전히 ~ing 진행 중이다. 이미 망가져 버려서 고치거나 되돌릴 수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끝나버린 망가진 존재는 없다. 나도, 너도, 우리는 아직 끝이 아니다. 다시 선택하고 결정해보자. 미국 뉴욕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포수인 요기 베라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시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작과 포기는 바로 나만 결정할 수 있다.


김형경의 『만 가지 행동』에 보면 ‘아마추어가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일한다면 프로페셔널은 자기에게 유익하고 즐거운 일을 한다. 아마추어가 타인과 경쟁한다면 프로페셔널은 오직 자신과 경쟁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어제보다 조금 더 아름다워지려는 나, 프로다움을 순간순간 만들고자 하는 나 자신을 힘껏 응원해보자. 아마추어는 지금까지 했던 기록을 자랑하지만 프로는 지금부터 어제와 다른 기록을 남긴다. 아마추어는 남과 비교해서 죽을 때까지 남들처럼 살지만 프로는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시도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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