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너구리 Feb 26. 2021

청춘, 전주 막걸리

그런 날이 일상이었다.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꾹꾹 참고 있던 잡념이 온 마음을 뒤흔들어 습관처럼 TV 리모컨을 누른다.

그러다 지역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채널을 멈추기도 한다.

막 음식을 삼키고 엄지를 치켜 올리며 “끝내줍니다!”라는 아저씨의 벌게진 얼굴이 화면 가득 차면 당장 그곳에 가고 싶다. 신기하게도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안감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스물다섯, 나의 남자친구는 스물넷

우리는 20대의 성공 기준인 취업에서 한참 멀어진 취준생이라 불린다.

사실 취준생도 허울뿐인 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일까?

나를 넘치도록 믿고 있는 우리 엄마는 자신의 딸이 실패자라는 것을 알까? 물먹은 종이 위에 다시 종이를 까는 것처럼 버텼지만 자책은 매일 나를 그렇게

무너트렸다.

 

그때의 우리를 불안감에서 잠시 멀어지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전주 막걸리’였다.

상다리 부러지게 잘 차려진 막걸리 한 상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육해공 다모인 상차림은 빈틈 하나 없는 것처럼 완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보고만 있어도 즐거웠다.

 ‘완성 되어 있었으니까.’

 

취준생의 가난한 주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부러워하다 말 줄 알았는데

“어? 청주에도 있다! 전주 막걸리 있어.”

한참 핸드폰을 만지던 남자친구가 전주식 막걸리집을 찾아냈다. 그것도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라니!

 지금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선택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면 스물 다섯의 나는 교통비가 가고 싶은 장소에 갈 수 없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볍게 겉옷 하나 걸치고 막걸리 집에 도착했다.

벼락같이 문을 열어보니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아저씨들만 보인다. 아까 봤던 벌게진 아저씨 얼굴! 덕분에 전주에 막 들어선 기분이다.

TV에 보던 홍어도, 간장게장도 없지만 저렴한 가격에 꾹꾹 눌러 담은 막걸리 한 주전자와

꽤 그럴듯한 상차림은 기분 내기에 충분했다.

 

막걸리가 아닌 한낮 꿈에 취한 우리는 금새 한 주전자를 비워내고 꿈에 더 취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가난한 주머니 앞에 잠에서 깼다.

주머니를 부지런히 뒤져 100원, 50원까지 다 모으니 반 주전자 값에 딱 1000원이 모자랐다.

 

내가 겸연쩍게 웃으며 일어서려고 하는데 남자친구가 수를 세기 위해 펼쳐 놓은 동전을 서둘러 끌어 모아 주방으로 갔다.

사장님이 흔쾌히 허락 하셨나보다. 주전자 반보다 더 넘치게 받아와 나한테 쓱 내민다.

취업 준비가 길어지며 가장 못난 모습을 보인다 서로에게 미안 했던 우리는 잠시 즐거운 꿈을 꾸며 이 다음에 꼭 전주에 가자 약속했다.





생각 보다 늦었지만 약속을 지켰다. 함께 전주에 다녀 온지 벌써 3년이나 흘렀다.

전주에서 꽤 유명한 집에서 2명이서 먹을 수 있는 제일 큰 상을 주문했다.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진 막걸리 한상이 떡 벌어지게 들어왔다.

" 진짜 전주에 왔는데 그때 먹은 막걸리 맛보다 덜하다."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청춘의 추억과 그것을 함께 나누는 남편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나는 물에 젖어도 종이를 매번 다시 깔며 끝이 보이지 않던 취업 준비 기간을 홀로 버텨 왔는지 알았는데 아니였다. 자책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20대에 서로에게 늘 몇 장의 종이가 기꺼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낮의 꿈에 끝나지 않았고 지금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함께 선택하는 '동반자' 가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